[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양기하(梁基瑕, 1878. 10. 8~1932. 2.) 선생은 1878년 10월 8일 충남 논산군(論山郡) 두마면(豆磨面)에서 태어났다. 호는 하산(荷山)이며, 이명(異名)으로는 기하(基河), 인원(仁元), 그리고 임창주(林昌周) 등이 있다. 선생은 대한제국 말기 공주(公州) 군수 등 관직에 있다가 1910년 8월 경술국치(庚戌國恥)로 주권이 상실되자 국권회복을 모색하기 위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서간도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강원도와 황해도 등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던 박장호(朴長浩) 등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의 문인들과 더불어 교육사업에 종사하면서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군 양성에 노력하였다.
만주 광복군사령부 정보국장으로 적정 탐지와 일제에 빌붙은 부일배 색출
그러던 중 1919년 국내에서 3, 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이에 즉각 호응하여 일제를 무력으로 타도하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항일 무장투쟁단체의 조직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3월 15일 박장호, 조맹선(趙孟善), 백삼규(白三圭), 전덕원(全德元) 등 의병 출신 독립운동가들과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결성하였다. 대한독립단은 박장호를 도총재, 백삼규를 부총재, 조맹선을 총단장으로 하여 총무, 재무, 사법, 교통, 선전 등 각 부서와 남만주 각 지방에 지단(支團)을 두고 한인자치를 실시하면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여 갔다. 선생은 대한독립단의 교통부장, 선전부장을 순차로 역임하면서 국내에 독립군을 파견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일제 군경 및 부일주구배를 처단하는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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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
1921년 4월 6일 상해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그간의 경험을 살려 군무와 교통분과 상임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이때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태평양 지역에 이해 관계를 가진 열강들이 군비 축소 문제와 극동정책을 논의하기 위해 1921년 11월 11일부터 다음해 2월까지 워싱톤에서 태평양회의를 열기로 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임시정부에서는 이 태평양회의(워싱턴군축회의)에 한국 문제를 상정시켜 파리평화회의에서 이루지 못한 독립을 다시 한 번 관철시키고자 이승만(李承晩)을 전권대사, 서재필(徐載弼)을 전권부사로 하는 한국대표단을 구성하여 적극적인 독립 외교활동을 벌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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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시기 상해의 임시정부는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와 노동국 총판 안창호(安昌浩) 등 주요 국무위원의 사퇴,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부재 등으로 그 기능을 상실하여 가고 있었다. 따라서 임시정부를 명실상부한 국민의 대표기관이자 독립운동의 최고 통솔기관으로 개편하기 위한 국민대표회 소집 문제가 독립운동계의 초미의 관심거리였다. 이때 선생은 신익희, 손정도, 연병호(延秉昊) 등과 더불어 1922년 3월 11일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우리의 조국을 광복하려는 독립운동에 관한 일체 강령, 방략, 정책을 원만히 협의하여 적법 또는 합리적으로 신속히 실행하기 위하여 내외 각지 독립운동단체의 대표와 내외 각지의 신망과 지식이 특저(特著)한 인사를 망라한 대회의를 가능한 빨리 소집할 일을 임시정부에 건의할 것을 제안한 이래 줄곧 국민대표회 소집과 그를 통한 임시정부 개편 입장을 견지하였다.
특히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國民代表會籌備委員會)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어 국민대표회 개최 문제가 답보상태에 빠지자, 선생은 그 해 7월 안창호, 신익희, 김구, 조소앙(趙素昻), 이시영(李始榮) 등 50여 명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이를 타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이를 통하여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 사이의 반목과 갈등을 해소시키고, 국민대표회를 조기 개최하여 임시정부를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최고 통괄기관으로 거듭나도록 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항일 무장투쟁을 위해 만주로 이동
이 같은 독립운동계의 난맥상에 상심한 선생은 상해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만주로 이동하여 재차 항일 무장투쟁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던 중 1923년 9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의용군(義勇軍) 제1중대장 백광운(白狂雲), 제2중대장 최석순(崔錫淳), 제3중대장 최지풍(崔智豊)제5중대장 김명봉(金鳴鳳) 등이 대원 약 500여 명을 이끌고 이탈한 뒤, 대표를 파견하여 이전의 광복군사령부를 계승한 임시정부 직속의 통일 군정부(軍政府)의 수립을 요청하자 선생은 이를 기회로 만주로 귀환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4년 8월 서간도 통화현(通化縣)에서 이들 중대장 김승학(金承學), 윤세용(尹世茸) 등과 협력하여 임시정부 군무부 직속의 군사기구인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를 조직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재개하였다. 그리고 1927년 3월에는 참의부의 교육위원장 겸 제3행정구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재만 한인동포들에 대한 민족교육과 자치의 실현에 이바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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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침략한 일제의 도발에 맞서 조선혁명당과 국민부, 단일 임전태세 결정
조선혁명당은 재만 한인동포에 대한 자치 행정기관인 국민부와 표리일체를 이루며 항일 무장투쟁 등 군사적 임무를 전담하던 조선혁명군을 지휘 통솔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당, 정, 군의 체제로서 서로 유기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선생은 이들 조직 모두에 관여하면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31년 9월 만주 침략을 도발한 일제는 통화, 유하, 환인(桓仁), 신빈(新賓), 청원(淸源), 해룡(海龍), 금천(金川) 등 동삼성 수도(首都)와 현읍(縣邑)을 점령하고, 만주 동북부 지역의 한국독립군과 남만주 지역의 조선혁명군 및 중국의용군 등 항일 무장단체들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였다.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선생을 비롯한 조선혁명당, 조선혁명군, 국민부 간부들은 1931년 12월 17일 신빈현 하북(河北)에 있는 서세명(徐世明)의 집에서 긴급 중대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조선혁명당과 국민부를 단일 조직체로 만들어 임전태세를 갖추기로 결정하면서 이미 피체된 현익철(玄益哲)의 후임으로 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이호원(李浩源)을 선출하고, 선생을 정치부장에 선임하는 등 당, 군의 조직을 정비하고 임원을 개선하여 대일 투쟁역량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밀정들로부터 이 같은 회의 사실을 탐지한 통화 일본영사분관 경찰서에서 일경 50여 명과 중국본안대 병력 100여 명을 동원하여 12월 19일 신빈현 회의장을 포위 습격하였다. 그리하여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이호원과 조선혁명군 사령관 김관웅(金寬雄), 그리고 국민부 공안부 집행위원장 이종건(李鍾建) 등 주요간부 10여 명이 체포되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일본 경찰대와 만주군 협공에 맞서 교전 중 관전현에서 순국
이 회의에 참석했다 탈출한 선생은 양세봉(梁世奉), 고이허(高而虛) 등과 조선혁명당, 조선혁명군, 국민부의 조직 재정비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을 맡고,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은 고이허,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은 양세봉이 맡아 당, 정, 군의 조직을 재건하면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여 갔다. 그러던 중 선생은 1932년 2월 관전현(寬甸縣)에 주둔하고 있다가 조선총독부 초산(楚山)경찰서 경찰대와 만주군의 협공을 받고 격전 끝에 수십 명의 조선혁명군 부하 병사들과 함께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자료: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