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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 마지막 경위대장 '윤경빈'

《대한민국임시정부 마지막 청사 경교장》읽기 <1>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누구요?, 이승만 대통령은 뭐이라할까. 자기 편한 대로만 생각하신 것 같아요. 편할 때는 나오고 불편할 때는 안 나오시고 한 것 같아요”

이 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마지막 경위대장이었던 윤경빈 선생의 말이다. 윤경빈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마지막 청사 경교장》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당시 경교장과 관련이 있던 4명의 증언자(윤경빈, 김자동, 김정륙, 오경자)들로부터 증언을 받아 정리 한 책인데 윤경빈 선생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이러한 말이 나온 배경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경교장에서 연 국무위원회 관련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경교장에서 백범 주최로 전체 국무회의를 했다고 하지만 그건 참으로 쓸쓸한 일이었다. 풍찬노숙으로 목숨을 불사하고 독립운동을 하고 돌아온 백범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고국땅을 밟는 그 순간부터 미군정하에서 홀대를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대한민국임시정부마지막청사 경교장> 책 표지

고대하던 광복의 기쁨이 귀국으로 곧바로 연결되지 못한 것은 중국쪽 문제가 아니라 국내 문제 때문이었다. 당시 임시정부는 중국 중경(충칭)에서 광복을 맞이했는데 장개석 총통(1887-1975)은 특별기를 중경에 보내와 상해까지 임시정부 요인들이 갈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었다. 그러나 고국의 미군정 하지 사령부에서는 차일피일 상해로 비행기를 보내오지 않았다. 20일 동안 그렇게 상해에서 발이 묶여 있었던 것이다.

“우린 상해에서 썩었죠. 해방직후 정치 국면에서 20일이란 시간이 상당히 중요한데 20일 동안 썩게 만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라고 얘기하긴 곤란하지만 좌우간 결과적으로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들어오지 못하고 썩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래서 들어왔는데(귀국) 국민들은 귀국 다음날에 신문을 보고 알았던 것이지요.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한 사람들은 이게 뭔가 잘못되었구나라고 느꼈지요”

   
▲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환국 기념 사진(중경,1945)

일제가 물러간 뒤 국내에는 미군정이 들어와 있었고 20일 동안이나 임시정부 요인들을 챙기지 않고 있었다. 중국의 임시정부가 국내에 들어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 사령부가 신속히 임시정부 요인들을 환국 시키지 않은 것은 김구 주석이 주최한 ‘국무회의’에 이승만이 한번 출석하고 안 나온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 임시정부가 개인적으로 환국하게 된 경위에 대해 우리로서는 아주 비통한 겁니다. 임시정부가 몇 십 년 동안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투쟁했는데 미군정이 ‘우린 모른다’는 식으로 나온 것에 대해 우리는 서글픔을 가질 수 밖에 없었죠.” 윤경빈 선생의 말은 이어졌다.

그렇게 풍찬노숙을 한 독립운동가들은 찬밥 신세가 되어 경교장에 짐을 풀었다. 짐을 풀었다고는 했지만 김구 주석을 비롯한 유동렬 참모총장, 김상덕 문화부장 등 일부만 경교장에 머물렀을 뿐 나머지 임시정부 요인들은 2급 호텔인 시내 한미호텔로 갔고 또 일부는 일가 친척집으로 가는 등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 상해도착한 임시정부 요인들(상해, 1945)

숙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귀국 후 한 20일간 정도는 봉영위원회에서 도와줘 그런대로 스테이크도 먹고 하다가는 그 뒤는 끼니를 때울 형편도 못될 상황이 되고 말았다. 중국에서 독립운동 할 때와 마찬가지로 끼니 걱정을 해야하는 지경에 놓이고 말았는데 윤경빈 선생은 이 대목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고 했다.

“경교장이라고 하면 우리 국민은 백범 김구 선생이 거처하던 것이라고 느낄지 모르지만 그건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곳은 임시정부가 들어와서 처음으로 업무를 시작한 데다 경교장은 그야말로 독립운동 하던 모든 분들이 국내에 들어와서 결집된 모습으로 국민을 처음 대한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지요. 거듭 말하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처음 국내에 들어와 짐을 푼 곳이요, 국민과 첫 대면을 한 곳이며, 백범 선생이 입국성명을 낸 곳이지요. 또한 백범이 북에 가서 평화통일을 기도한 장소이기도 하고 나중에 백범 선생이 시해당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마지막 경위대장을 지낸 윤경빈 선생은 광복 70주년 기념 구술자료집인 《대한민국임시정부 마지막 청사 경교장》에서 경교장의 역사성에 대해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풍찬노숙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뛰었던 독립운동가에게 있어 ‘경교장’은 남다른 의미로 남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마지막 경위대장 <윤경빈>

*1919년 평안남도 중화 출생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
*메이지대학교 법학학사
*1944년 일본군에 학도지원병으로 강제입대했으나 장준하 등과
  일본군을 탈출하여 한국광복군에 입대
*1945년 김구 주석과 임시정부 요인 수행원으로 환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위 대장
*한국독립유공자협회 회장, 제 14대 광복회 회장, 백범기념관건립위원회 위원장

 

   
▲ 백범 김구 선생이 귀국한 뒤 돌아가시기 전까지 집무실로 쓰던 경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