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희 놈은 상긔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레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
우리가 익숙히 들어왔던 남구만의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노랫말이다. 무대에서는 보통의 시조창보다도 훨씬 느리면서도 장중미가 느껴지는 노래가 펼쳐진다. 박문규 명인이 전통가곡 남창 평조(平調) 초수대엽(初數大葉) <동창이 밝았느냐>를 부르고 있다. 세상에 어찌 이렇게 느린 노래, 뱃속 저 깊이에서 울려나오는 노래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저 무대에 앉은 이는 선비인가, 가객인가, 신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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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문규 명인의 “전통가곡 발표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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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중하게 전통가곡을 노래하는 박문규 명인 |
오늘 우리는 박문규 명인의 “전통가곡 발표회”에 와있다. 문화체육관광부 2015 원로예술인 공연지원, “한국정가악(正歌樂)연구원” 주관으로 1월 23일 늦은 5시 서울 삼성동 한국문화의집(코우스)에서 열린 것이다.
“동창이 밝았느냐”로 문을 연 공연은 남창가곡 평조(平調) 이수대엽(二數大葉) “강호에 기약을 두고”와 황숙경 명창의 여창가곡 평조(平調) 우락(羽樂) “바람은 지동치듯 불고”가 이어진다. 또 박문규 명인의 남창가곡 평조(平調) 언락(言樂) “”벽사창이 어른어른커늘“, 황숙경 명창의 여창가곡 반우반계(半羽半界) 반엽(半葉) ”님하여 편지 전치 말고“도 청중들이 숨을 죽이게 한다.
특히 황숙경 명창의 “바람은 지동치듯 불고”는 가슴을 아련하게 한다. “바람은 지동(地動)치듯 불고 궂인비는 붓듯이 온다 / 눈 정(情)에 거룬님을 오늘밤에 서로 만나자 하고 판(板) 첩처서 / 맹서(盟誓) 받았더니 이 풍우 중(風雨中)에 제 어이 오리 / 진실로 오기곳 오랑이면 연분(緣分)인가 하노라“ 이 노래의 주인공은 아마도 기생인 듯한데 임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주인공은 “아무리 맹세하고 약속했지만 이 폭풍우 중에 과연 올까?”라고 걱정하면서도 만일 온다면 우리는 진정 인연일 것이라는 가냘픈 기다림으로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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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아한 목소리로 청중을 사로잡은 황숙경 명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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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가곡을 해설하고, 박문규 명인을 소개하는 한국전통음악학회 서한범 회장 |
오늘의 공연 해설을 맡은 한국전통음악학회 서한범 회장은 전통가곡에 대해 정의한다. “전통가곡은 화려하고 난삽한 기교보다는 절제된 감정으로 처리하는 가락의 연결이 자연스럽다.”며 “장단의 강약이나 시김새의 처리, 호흡의 조절, 반주와의 조화 등으로 음악적 균형을 이루고 있어, 언제고 다시 듣고 싶은 노래로 남는 음악”이라고 강조한다.
제2부에서는 모두 7곡이 불려진다. 아주 느린 평조의 노래들로 채워진 제1부에 견주어 이제 노래는 점차 빨라진다. 남창 계면조(界面調) 초수대엽 “청석령 지나거다”, 여자 계면조 편수대엽(編數大葉) “모란은 화중왕이요” 등이 계속된다. 마지막으로 남창가객과 여창가객이 함께 부르는 남녀창 계면조 태평가(태평가) “이려도 태평성대‘로 무대의 막은 내린다. 이로써 우리는 태평성대를 맞이할 것이리라.
우리의 전통가곡 놀랍게도 겨우 40~45자의 노랫말로 이루어진 노래를 부르는 데 10~12분이나 걸린다. 이렇게 느리고 장중한 그리고 청아한 노래를 부르면서 흥분하거나 화내거나 아니면 사악한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옛 선비들이 자신들을 갈고 닦기 위해 불렀던 전통가곡은 그래서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오를 수 있었고, 그 어떤 음악보다 더 위대한 장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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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가곡의 아름다움에 숨을 죽이며 침잠하는 청중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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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문규 명인과 황숙경 명창이 남녀창 계면조 태평가(태평가) “이려도 태평성대‘를 부른다. |
갈월동에서 왔다는 이성현 (49, 교사) 씨는 “세 번째 가곡 공연을 보았다. 처음에 졸리기도 하고 어려워서 다가서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우리의 위대한 음악이라기에 꾹 참고 듣다보니 이렇게 아름답고 장중한 노래가 또 있나 싶다. 두 시간 내내 청아한 노래에 흠뻑 빠져 숨도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괜히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오른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세상이 시끄럽게 요동치고 한파가 맹위를 떨치던 겨울밤 우리는 옛 선비처럼 가곡의 향연을 즐기며, 깊이깊이 침잠하고 있었다. 아니 서서히 선비의 대열에 동참하고 있었다. 아 우리는 진정 위대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만끽할 수 있는 사람들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