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오른쪽에 흥선대원군의 척화비와 왼쪽으로는 충무공의 충렬사가 보인다. |
![]() |
||
충렬사 오르는 계단과 삼문 |
![]() |
||
최근에 세운 충렬사비 |
![]() |
||
남해 관음포 충무공 이순신장군 사당 충렬사 |
![]() |
||
충렬사 현판 |
![]() |
||
충렬사 사당 옆에 세운 충무공비 |
![]() |
||
충렬사내 이순신장군 영정과 신주 |
![]() |
||
충렬사 사당 내 이순신장군이 쓰던 병장기와 깃발 그리고 관인의 확대모습 |
![]() |
||
충렬사 내 세운 비석에는 충무공의 내력이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
![]() |
||
비석의 위에는 용트림하는 청룡과 황룡이 새겨져있다. 특이한 것은 이수의 용들에 단청을 한 모습이다. |
![]() |
||
관음포 안에 있는 재현된 거북선 |
![]() |
||
거북선 안에는 거북선에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포와 병장기 들이 전시되어있다. |
![]() |
||
전장에 임하는 이순신 장군의 의지를 표현한 글. "살고자 도망치면 죽을 것이요 죽기로 싸운다면 반드시 살아날 것이다." |
![]() |
||
남해 관음포에는 유일한 해상법당 반야용선이 있다. |
![]() |
||
반야용선내 모셔진 부처님과 보살 그리고 용왕 |
![]() |
||
바다를 지키는 관음포 용왕의 모습. 산신령과 비슷한 모습이지만 눈이 둥글고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있으며 손에는 용의 뿔을 들고 있다. 또 아래에는 용을 타고 있는 모습이 용왕을 뜻한다. |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조선중기 일본 침략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노량해전의 격전장이 바로 남해 관음포다.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던 이곳에는 한민족의 영원한 성웅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장군은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할 것을 다짐한 듯한 말들을 남겼다. 또 그의 행동을 보면 그렇게 죽기로 마음먹지 않고는 하지 못할 행동들을 했다고 한다.
장군은 퇴각할 것이니 길을 비켜달라는 왜장 소서행장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왜군을 살려보내느니 차라리 내가 죽겠다는 각오로 싸웠다. 그런 이순신에게 대적할 용기가 없었던 왜장 소서행장은 아직 퇴각하지 않은 왜장들에게 연락하여 500여척의 왜병선들로 대규모 함대를 구축하고, 그 대규모 함대에 의지하여 퇴각한다면 감히 이순신 장군도 대적하지 못할 것이라는 작전을 세웠다.
그러나 이순신장군은 그 규모에 전혀 위협당하지 않고 결코 마지막 한명의 왜병조차 살려보내지 않겠다며 뱃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왜병들은 연합군이었던 명나라 제독에게 뇌물을 써가며 무사히 퇴각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이순신은 이를 눈치채고 퇴각하려 나오는 대규모 왜선들을 향하여 마지막 전투를 벌였고, 500여척의 왜선들 중 소서행장을 태운 대장선을 호위하던 50여척의 배들만이 구사일생으로 도망갔다.
치열했던 전투는 끝이나고 전쟁의 영웅이었던 이순신 장군도 자신의 생을 이곳에서 마감하였다. 장군이 죽자 백성들과 병사들은 통곡하였고, 그의 유해는 현재의 충렬사에 잠시 모셔졌다가 아산 현충사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장군을 모셨던 곳에는 충렬사를 지어 장군의 높은 뜻을 기리고 그의 혼을 위로하며, 후세인들에게 참배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장군의 뜻을 기리고 탐방객들에게 교육용으로 활용하고자 관음포구에는 거북선 모형배와 거북선에 갖추었을 병장기와 깃발들이 전시되어있었다. 많은 책으로 접하여 알고 있는 바이지만 그래도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니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남해 충렬사 바로 앞에는 130여년 전에 프랑스 함대를 격파한 뒤에 세웠던 흥선대원군의 척화비가 있었다.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오랑캐를 양이(洋夷)라고 하였으니, 이것도 글자를 잘못 택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夷)란 중국인들이 동쪽에 사는 우리민족을 뜻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분석해보면 큰 활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지 결코 오랑캐라는 뜻이 아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사람들은 자신들을 뜻하는 글자인 이(夷)를 오랑캐의 대명사로 쓰고 있으니, 얼마나 사대주의에 찌들었었던 것인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남들이야 그리 부를지라도 스스로는 자존심을 가지고 살 일이지, 스스로 오랑캐를 자처하며 망해버린 명나라의 뒤를 이었다는 소중화사상에 사로잡혀 살았던 조선시대 500년이 다시금 얼마나 잘못된 시대였는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도대체 지도자라고 자칭하던 고관대작들과 선비 유생들. 그리고 그 정점에 있었던 조선의 군왕들을 되돌아보면 조선이 500년을 근근이나마 이어왔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을 일이 아니라, 치욕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중국과 일본은 나라가 바뀌었다. 중국은 중국대로 황실의 정치적 실패로 민심을 잃고 도처에서 반란이 발발하였고, 더구나 한민족의 한 계통인 여진족이 힘을 키워 처내려가자 명나라를 더이상 잇지 못하고 망했고, 일본은 일본대로 100여년의 내전 이후 조선침략으로 수많은 백성들의 삶을 빼앗아간 집권 쇼군정치에서 도쿠가와의 막부시대로 바뀌었지만, 조선은 전쟁에 가장 큰 피해를 보고서도 그 정권이 그대로 다시 세습되었고, 오히려 더욱더 철저한 성리학 중심의 고착화와 망해버린 명나라를 잇는다는 소중화 사상에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은 임진왜란이 끝이난 후 조선에 파병해준 명나라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된다며 중국에도 없는 명나라 황제의 사당을 지어서 그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그 사당을 중심으로 서원을 세우고 그 서원을 중심으로 당파를 만들어 자신들만의 권력욕을 유지하는데 적극 활용하였다. 명분은 의리를 잊지말아야 사람이라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당파의 이익추구였던 것이다.
충렬사와 척화비를 보고 내려오자 관음포 앞바다에는 해상 반야용선사가 있었다. 반야용선사는 임진왜란과 바다를 근거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한맺힌 사연을 담아 풀어줄 수 있는 해상법당이다. 근래에 세워진 반야용선사는 이제 전국의 불자들이 찾아와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해변을 돌아보고 임진왜란에 희생당한 원혼들의 극락왕생을 빌며 법회도 보고 방생도 하는 법당으로 활용되고 있다.
반야용선에는 바다의 임금인 용왕이 부처님 보살님과 함께 모셔져 정말 유일무이한 해상법당임을 보여주었다. 얼마후 날이 따스해지면 전국의 사찰과 암자들이 방생법회를 하기 위하여 하루에도 5~6회 출항한다고 한다. 기자는 아직은 쉬고 있는 반야용선사에 들러 잠시 고개를 숙여 고혼들의 극락왕생을 빌고 발길을 돌렸다.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 |
||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낙산사칠층석탑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유산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