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논개의 무덤과 사당 |
![]() |
||
무덤 앞에 있는 사당 |
![]() |
||
논개의 무덤 |
![]() |
||
▲ 최근에 함양군에서 관민이 세운 논개의 위령비 |
![]() |
||
▲ 최근 함양군에서 세운 위령비 상세 |
[우리문화신문= 최우성 기자] 임진왜란 당시 진주 남강에서 승리에 도취했던 왜장을 끌어안고 투신하여 한민족 여인의 기개를 떨쳤던 논개의 무덤이다. 논개는 본래 전북 장수 태생인데 그녀의 고향인 장수군 장계면 주촌마을에는 논개의 생가와 그녀를 기리는 사당이 있다.
그런데 논개의 무덤은 그녀가 투신해서 죽은 진주도 아니고 그녀의 고향인 장수도 아닌 이곳 함양에 논개의 무덤이 있으니 무척 특이한 사연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를 들어보자.
논개는 진주에서 죽은 뒤에 건져졌고, 뜻있는 진주민들이 그녀의 유해를 걸머지고 그녀의 고향인 장수 장계를 향하여 산을 넘고 넘어 이곳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이곳에서 장수 장계까지는 이제 50여리가 남은 거리였다. 이제 고향으로 가려면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가는 육십령만 넘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때는 날도 더운 여름철 인지라 이곳까지 오는 동안 논개의 시신이 더위에 많이 부패하여 더 이상 갈 수도 없었을 뿐 더러, 육십령을 넘으려면 당시에는 고개 위에 산적들이 버티고 있어 더 이상 가지 못하고 이곳에 양지바른 땅을 찾아 묘를 쓰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논개의 무덤은 그녀가 죽은 진주도 아니고 그녀의 고향인 장수도 아닌 이곳 함양 서상면에 묻히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논개의 무덤과 그녀의 혼을 기리는 비석과 혼령을 모시는 사당이 마련되어 있다. 함양을 지나는 이들이라면 서상면 읍내에서 멀지 않은 논개의 무덤에 잠시 들러 머리를 숙이고 갈일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백성의 참된 길이 무엇인지 한 번 쯤 생각해보면서...
그런데 이런 자취를 남긴 논개의 역사적 행적이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은 1620년 경 유몽인이 쓴 "어유야담"에 그가 들었던 진주에서의 이야기를 글로 남긴데서부터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기록이 없었더라면 이마저도 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이제 진주에서는 논개를 기리는 시를 짓고 여기에 곡을 붙여 그녀를 기리는 제향때 쓰고 있다. 잠시 그 노랫말을 적어본다.
1절
수양버들 피리에 봄도 늙는데
가야금 줄에 하소연하는 논개의 죽은 넋이
칠백리 남강 물결속에 목메어 우는 듯
촉석루 무슨 말 할 듯 야속해 옵니다.
2절
수양버들 피리에 봄도 늙는데
허물어진 서장대 달빛만 밝게 비치네
칠백리 남강물결위에 그림자 지우며
천만년 풀지 못한 술움에 젖었네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 |
||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낙산사칠층석탑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유산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