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금당은 동쪽 입구로부터 들어가게 되어 있다. 우리는 그곳(벽화)으로 가기 위해 먼저 본존 앞에서 왼쪽으로 꺾었다. 약사삼존불 앞에 왔을 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서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일렬로 나란히 줄지어져 있는 오래된 불상과 검은 기둥 사이의 서쪽 벽에 아미타불이 밝은 모습으로 합장한 손의 모습까지 확실히 보이는 것이었다. 동쪽 입구에서 조금 먼 거리에 있는 아미타불이 이렇게 확실히 보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이 정도의 거리를 두고 바라다본 벽화의 조각적인 아름다움이 선명하게 눈에 새겨지는 것 또한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벽화에 이르는 길목의 본존불과 좌우 조각에는 눈도 주지 않고 우리는 아미타불쪽으로 내달았다. 이 그림이야말로 동양회화의 절정이다. 꽤 박리된 부분이 있었지만 그 흰 박리(剝離)면조차 벽화의 신선한 생동감으로 느껴졌다. 이 벽화 앞에 서면 아무 생각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보태고 더할 것이 없다. 그저 바라다보고 취할 뿐이다.”
이것은 금당벽화로 유명한 나라의 고찰 법륭사 금당(대웅전)에 화재가 나기 전 금당벽화를 본 일본의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와츠지데츠로(1889~1960)가 《고사순례(古寺巡禮)》에서 한 말이다. 《고사순례》는 절 순례기의 성서라고 일컬어질 만큼 일본인이라면 한번쯤 읽는 책이다. 고구려 스님 담징의 작품으로 알려진 ‘금당벽화’는 1949년 1월 26일 금당에 화재가 일어나 금당벽화의 일부가 불타고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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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타기 전의 일본 나라 법륭사 10호 벽의 "약사정토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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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호 금당벽화 불탄 모습 앞에서 합장하는 주지, 아사히신문(1949년) |
금당 화재의 원인에 대해서는 당시 벽화 보존을 위해 화가를 동원하여 베끼기 작업을 했는데 이때 모사 화가가 쓰고 있던 전기 이불방석이 발화점이라는 설과 형광등용 전열기기의 누전설 또 다른 하나는 누군가에 의한 방화설이 있으나 아직 확실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행히 일부 손상된 벽화는 아크릴수지와 요소수지를 주입하여 경화시킨 후 1954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복원하여 법륭사 안 수장고를 지어 복원해두고 있다. 그러나 보존상의 이유로 일반인들에게는 공개하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법륭사 금당 화재를 계기로 서둘러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하여 1950년 8월 29일부터 엄격한 관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