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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에베레스트 사나이 제주인 고상돈 !!

   
제주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한라산 등반시작 점인 해발1100고지에 고상돈로 가 있고, 고상돈의 묘와 동상과 비가 있다. 간혹 한라산 등반객들 중에 고상돈의 묘를 둘러보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했던 고 고상돈의 묘

 

   
묘 봉분에 세겨진 묘비 "그리던 품안에 안긴 아름다운 넋이여 못다한 꿈을 접고 고이 잠드소서"

 

   
고상돈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과 그의 등정모습을 동상으로 세운 모습

 

   
태극기 휘날리는 고상돈 모습

 

   
영원한 산사나이 고상돈의 모습

 

   
한라산의 상징인 흰사슴(백록)이 고상돈의 묘 옆에 있다.

 [우리문화신문= 최우성 기자]  1977년 9월 15일 한국인 최초로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를 올랐던 고상돈! 그는 지금 세상에 없지만 그의 고향 제주 한라산 1100고지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와 동상 그리고 그의 묘가 소박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기 이전 한국인 산악인은 감히 한번도 에베레스트에 도전하지 못했다. 한국의 산악인으로 히말라야에 등정을 시도한 기록은 1962년 히말라야산맥의 한 봉우리인 8172m 디올라가리봉이었고 그것도 정상이 아니라 해발 6700m 지점까지 가본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당시 한국 산악인이 히말라야의 최고봉인 8848m에 도전한다는 것은 꿈같은 일이었다.

그래서  히말라야 원정대가 1977년 6월 김포공항을 출발했으나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고, 또 성공하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니 당시 고상돈을 비롯한 원정대는 뜻있는 사람들 몇몇 외에는 성공을 기원해주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그 어려운 길을 나서는데 든든한 후원자도 없이 빈약한 장비로 쓸쓸히 다만 비장한 각오 하나만으로 도전했던 것이다.

그렇게 출발한 한국의 산악인들이 등정을 시도하였고, 원정대의 1차 등정이 실패한 후 2차로 도전하여 당당히 세계 최고봉에 한국인 최초로 태극기를 휘날린 것이다. 그래도 산을 좀 탈줄 아는 산악인이라면 누구나 꼭 한 번쯤 오르고 싶은 에베레스트다. 하지만 에베레스트는 항상 특별히 파란 하늘과 산의 영기를 나타내듯 흰구름에 감싸인 채 수 만년동안 하얀 눈과 그 눈이 굳어 얼어붙은 만년설이 눌려서 쌓안 빙산으로 덮여 있었다.

 뿐만아니라, 가파른 얼음 절벽과 90도에 가까운 암반으로, 험하기 그지 없다. 사람이 견디기 어려운 혹한으로, 늘 겨울이고, 빙벽이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고, 곳곳이 얼음 구덩이가 있어서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감히 도전하지 못할 금지의 성역이었다.

그래서 그곳에 사는 히말라야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늘 곁에서 보면서도 감히 오를 생각을 하지 않고, 자연의 신비요 삶을 지배하는 자신들의 삶을 관장해주는 신이 사는 곳으로 성스러운 경외심을 품을 뿐이었다. 

그렇게 성스럽게 여겨지던 히말라야산맥의 에베레스트는 1850년대 인도의 측량기사들에 의하여 그 높이가 공식적으로 8848m로 측정되었고, 그 측량기사의 이름을 따서 에베레스트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런 에베레스트 꼭대기에 처음으로 오른 사람은 에베레스트가 측정 된 뒤 100년이 지난 1953년 5월 2일 '에드먼드 힐러리'라는 뉴질랜드 산악인과 그와 함께 갔던 네팔인 셀파 '텐징 노르가이'였다.

이전에는 아무도 올라보지 못했던 성역이었던 에베레스트에 에드먼드 힐러리가 올랐다는 뉴스가 뜨자 이후 전세계의 산악인들은 이를 정복(?)하기 위하여 경쟁이 치열해졌고, 그 경쟁속에 흰 빙벽 속으로 많은 산악인들의 목숨을 바쳐야 했다. 하지만 힐러리가 오른 후 한사람 한사람 에베레스트는 등반자들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그 수는 차츰 늘어났다. 하지만 산에 오르기 전에 네팔인들 처럼 성스러운 산신께 받아달라는 간절한 기원은 필수가 되었다.

한국도 등산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은 언젠가 꼭 한번 오르리라는 다짐으로 도전을 했으나, 그것은 오직 마음뿐 한국의 산악등반대의 수준은 세계의 중위권에도 들지 못했다. 경험도 없고 장비도 빈약하고 또 훈련을 위한 후원금이 없어 틈틈히 일하면서 모은 자비를 들여서 오직 산을 오르겠다는 일념으로 원정대를 꾸리던 형편이었다.

그렇게 열악한 환경속에 1977년 9월 초 원정 등반대도 처음 도전조가 실패하였고, 두번째로 도전조에 들었던 고상돈이 5월 29일 천신만고 끝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한국은 초 여름  더위가 막 시작되던 때인지라, 라디오를 통해서 알게된 고상돈의 에베레스트 등정은 정치적으로 억눌려 살고있던 많은 한국인들에게 잠시나마 세상시름을 잊게 해주었다.

그의 등정으로 한국은 세계에서 8번째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국가가 되었다. 한국은 산악 후진국에서 단번에 산악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후 고상돈은 도 다시 세계의 고봉들을 오르기 위하여 나섰고, 2년 후인 1979년 5월 29일 알라스카 메킨리봉을 등정하고 내려오는 도중 자일 사고로 빙벽속으로 추락하여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에베레스트 등정으로 한국산악인들은 용기 백배하게 되었고, 뒤를 이어 많은 유명 산악인들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에베레스트는 물론이고 히말라야 8000미터 이상의 고봉들을 14좌나  오른 엄홍길 같은 위대한 산악인도 탄생하게 되었고, 그 외에도 많은 산악인들이 히말라야를 비롯한 세계의 고봉들을 하나씩 등정하였다.

고상돈이.에베레스트 등정을 위하여 골몰할 때, 한국은 유신독재정치의 암울한 현실속에서 젊은이들은 현실과 이상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정치에 눈돌리면 경찰과 정보당국의 눈에 띠기 마련이었다, 민주화가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를 실현하기는 자신의 생명은 물론 집안이 풍비박산 날 수도 있었기에 젊은이들은 너무도 힘든 시기였다.

그러나 산에 오르는 것이야 누가 탓할 바가 아니었기에, 세계의 고봉을 향해 도전으로 자신의 목표도 세우고 한국인으로 국위도 선양할 수 있는 등산은 자신만의 삶을 값있게 살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큰 매력이었다.

고상돈은 제주에서 태어난 제주 고 씨였다. 그는 산에 도전하여 산사람이 되었지만, 이제는  그의 공적을 기려 제주도 남북을 가로지르는 해발 1100고지 한라산 등반로 초입에 제주인의 명예를 드날린 그의 동상을 세우고, 찾지 못한 육신대신 유품을 모아서 묘를 쓰고, 그의 위대한 여정을 새겨 비석을 세워 그의 공적을 기록하였다.

그의 묘와 비석이 있는 이곳에는 그의 이름을 떠서 도로 이름도 '고상돈로'로 이름지었다. 한라산을 오르는 이들이여, 한라산의 산신이 된 우리의 산악인 고상돈의 묘역도 기억하고 지나면서 목례라도 하고 오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회원, 문화유산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