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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연천의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릉을 찾아서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에 있는 신라 56대 경순왕릉 조감도

 

   
능으로 가는 길은 잘 포장되어있다

 

   
경순왕릉 전경, 능의 좌우와 뒤로는 곡장이 둘러있고, 앞에는 비각과 작지만 재실도 갖추었다. 재실은 1986년에 세워졌다.
   
왕릉으로 최소한의 격을 갖춘 경순왕릉. 한때 유실되었다가 조선 영조 때 다시 찾았다.

 

   
조선왕릉의 경우에는 석양이 능 주변에 배치되었으나, 경순왕릉의 경우에는 능의 앞에 좌우로 배치되었다. 전쟁의 흔적인지 입부분과 엉덩이 부분이 손상되었다.

 

   
최근에 능 주변을 호석으로  둘렀고 앞부분에는 꽃 장식이 있다.

 

   
왕릉의 뒤에서 본 모습

 

   
제사 때 사용하는 재실

 

   
비석으로 당시에는 많은 내용을 기록했을 것이나, 지금은 전혀 글씨를 알수가 없다.
   
릉 앞에 세워진 경순왕의 능표

 

   
경순왕의 일생을 설명한 안내문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삼국의 역사기록이 많은 문제점이 있으나, 현재 기록된 역사에 따르면 신라왕조는 박혁거세가 기원전 56년 건국하여 936년 경순왕이 고려시조 왕건에게 나라를 바친 때 까지 1000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의 역사가 가장 길다고 기록한 연유는 고려가 신라의 문물과 제도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고구려나 백제보다 더 정통성을 두기 위함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시작되어 우여곡절 끝에 668년 고구려까지 멸망시키고 한반도 안에서 스스로 통일왕조를 이루었다고 자부하지만, 통일신라의 위 지역인 한반도 대동강 이북과 만주지역에는 엄연히 발해가 해동성국으로 번성하였기에, 통일신라라고 부르기 보다는 발해와 신라가 남북에 공존하였던 남북국시대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많이 있다.

 어떻든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당나라까지 끌어들이고, 자신들이 유지하던 신라 고유의 복식과 각종 제도를 당나라를 모방하여 제도를 개선(?)했다고 하며, 통일신라 이후로 한민족은 많은 부분에서 당나라와 흡사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조선시대 왕들과 대신들의 복식은 신라의 복식을 계승한 것인데, 그 복식은 통일신라기에 당나라의 복식을 받아들인데 연유한다. 당시 김춘추는 당나라 고종에게 원병을 요청하면서 당나라의 모든 제도를 신라에 적용하겠다는 약속을 하였고, 이후 자신들이 이어받았던 왕실의 복식과 대신들의 관복도 당나라의 예에 따라 모두 바꾸었다.

그리하여 신라의 찬란했던 왕들의 금관은 김춘추 이후 없어지게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과연 신라의 삼국통일을 한민족의 자주적 통일이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이룩한 한반도 아래지역을 통일한 신라는 268년 만에 다시 고려에 나라를 바치고 말았는데, 그 당사자가 다름아닌 신라 56대 경순왕이다. 경순왕은 후백제의 견훤에 의하여 견훤이 폐한 경애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나, 너무도 기울어진 신라를 더 이상 이끌수 없다고 판단하여, 싸우지 않고 자신과 신라민에 후의를 베푸는 왕건에게 천년사직을 바치게 되었다.

그렇게 나라를 바친 경순왕은 왕건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으나 왕건의 딸인 공주를 후비로 맞이하여 장인인 왕건 보다 더 나이가 많은 사위가 되었다. 그리고, 경순왕은 싸우지 않고 나라를 바친 그 공을 크게 여겨 왕건으로부터 강원도 금강산 근처에 있는 지역을 식읍으로 받았는데  그 지역은 그의 이름인 김부의 이름을 따서 지은 고장으로  '김부'군으로 불렸으며 이를 식읍으로 받아 노년을 편안하게 살다 죽었다.

그 때는 978년 이다. 그가 죽자 본래 그의 고향인 경주에 묘를 쓰기 위하여 운구행렬이 가던 중 그이 장례에 따라 경주근방의 민심이 동요할까 염려한 고려왕실에서는 개경의 100리 밖으로 갈 수 없다는 당시규칙을 내세워 경주로 그의 운구가 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현재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에 묘를 쓰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이후 오랫동안 관심의 밖에 놓여 돌보지 않아 조선시대에는 그 묘를 잃어버리게 되었었는데 영조 27년 묘의 능표를 발견하여 다시 보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한 것도 이닌데 왕이 되었다가, 자신의 왕조를 신생왕조에 바치고 자신은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천수까지 누리다가 간 경순왕이다. 과연 그의 일생을 돌아보면서 그의 묘에 들러 세월의 무상함과 함께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 그리고 나라를 경영하는 지도자들의 자세에 대하여 골똘히 생각해 본다. 자신의 영화가 중요한가? 자신이 속한 가계의 영화가 중요한가, 나라와 민족의 미래가 중요한가?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회원, 문화유산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