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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동래 임진왜란으로 산화한 선열들의 사당 충렬사를 가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민족의 최대 전란인 임진왜란의 처음이자 최대 격전장에서 장렬히 전사한 부산 동래 다대포 양산지역의 송상현 동래부사, 부산포 첨사 정발장군 다대포 첨사 윤흥신 등을 비롯하여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장렬히 싸우다 승화한 많은 군관들과 민간인들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모신 동래 충렬사를 찾았다.

 

태평세월을 보내고 있던 조선에 불어닥친 일본의 침략은 태평세월을 보낸 만큼이나 더욱 혹독하게 밀려왔다. 한민족 전란의 역사를 모두 뒤져 보아도, 이보다 더한 치욕과 상처는 없었을 것이며, 그 전란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임진왜란이 끝난 뒤 거의 300년 즈음에 조선은 다시금 일본의 침략으로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슬픈 역사의 반복을 개탄해 마지 않을 수가 없다.

 

동래 충렬사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현재의 왼쪽 기슭에 작은 사당형태로 있어왔으나, 이를 1978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확장하고 더욱 크게 성역화 하였다. 그 당시 대통령 이었던 박정희의 뜻이 반영되었으며, 선열들의 숭고한 뜻과 희생을 받들어 이를 국란극복과 국론통일의 장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아래는 당시 충렬사를 확장하여 새단장 하면서 쓴 정화기념비문을 다시 그대로 보았다.

 

부산 충렬사 정화기념비문

 

왜적이 바다를 건너 침략해 침략해왔던 1592년 4월 13일은 우리 한민족으로서 천추에 잊지못할 통탄의 날이 된다. 고려조 때에 몽고군이 우리 나라를 침공했고, 그 뒤 조선왕조 때에는 청군이 침략해 왔던 적이 있으나 임진왜란의 불행은 이들의 외침보다 몇 갑절이 더 뼈저리게 느껴지는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경제정책의 빈곤 위에 당쟁으로 국론이 통일되지 못했고, 그로 인해 국방이 부실해졌던 까닭에 더욱 큰 희생을 당해야 했던 사실을 상기한다면 적에 대한 적개심과 아울러 우리 스스로에 대한 회한이 동시에 통감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맨 먼저의 적의 침공을 받은 부산지방의 성주와 백성들은 일치단결 최후 까지 사워 그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던 것이다.

 

부산이 없으면 동래가 없고 동래가 없으면 나라 전체가 어찌될지 모를 사정을 누구보다 절감 했던 동래부사 송상현과 부산첨사 정발 다대첨사 윤흥신은 적을 맞아 싸운 첫날에 각각 장렬한 전사를 했고 뜻을 같이한 양산군수 조영규 교수 노개방 교생 문덕겸 등도 나라의 편안에 승화되는 드높음을 몸으로서 통감하지 않고서야 어찌 군 관 민 남녀노소 모두가 한덩어리 지어 목숨을 바칠 수 있었으며 칠년전쟁에 동래 수영에서 일어난 수많은 의병의 봉기가 이분들의 순절한 높은 뜻과 어찌 무관하겠는가?

 

적이 피신하라는 권유에도 응함이 없이 마지막 나라에 하직하는 북향요배하고 부친에게 글을 남겨 나라의 위급함에는 태산 같은 부모의 은혜도 뒤로 돌리지 않을 수 없음을 표한 뒤 태연자약하게 죽음에 나아간 송상현의 늠름한 태도 그대로 대의의 무거움 앞엔 개인의 목숨이 홍모같이 가벼운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희박한 곳에 나라의 번영을 생각할 수 없고, 나라의 안보사상이 미약한 곳에 나라의 태평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진리일 진데, 이곳에 충렬사를 세워 순국선열들을 추모해 왔음은 다름 아닌 이들 선열들의 충절을 만고에 기리려는 것이 어니와, 이번에 박정희 대통령의 분부로 문화공보부와 부산직할시가 경역을 크게 중수 확장하여 정화사업을 완수한 뜻도 이분 선열들의 충절을 국민의 호국정신으로 받들어 총화단결로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고 민족중흥의 역사적 대업을 이룩하려 함에 있는 것이니, 이제 우리는 선영의 영령에 부끄럼이 없게 그 막중한 은혜를 충성으로써 갚고 후손을 만대 반석위에 안주케 할 책임을 다하기 위해 우리 모두 가슴에 손을 얹어 멸사봉공 살신성인할 것을 굳게 맹세해야 할 것이다.

 

1978년 5월 이주홍 짓고 배재식 쓰다.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