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임진년(1592년) 4월 14일 부산포에 침입한 왜적은 상주 충주를 거쳐 한양에 이른게 불과 18일 만이었다. 5월 2일 한양을 점령한 뒤 6월 13일에는 평양'까지 접수하고 전 조선국토는 살인과 방화로 초토화 되어 갔다. 그러나 이들의 전쟁물자는 왜군이 점령한 육로로는 너무 힘들어 해상으로 길을 내야 했다.
그리하여 해상으로 길을 내기 위하여 경상우수사인 원균을 공격하자, 원균은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에게 구원요청을 하였다. 이때는 4월 29일 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원균의 구원요청을 즉시 받아들여 5월 4일 축시에 판옥선 24척과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을 거느리고 경상해안으로 출전하였다.
깜깜한 새벽에 출전하였으나 소비포 앞바다에 이르자 날이 저물었고, 5월 5일 당포 앞바다에 머물다 5월 6일에야 원균으로부터 왜적의 정세를 자세히 듣고 남해현령을 비롯한 경상도 전선 6척을 증편하고 거제 남단 송미포에서 밤을 지세웠다. 7일 아침 송미포를 출발하여 왜적이 머무르는 천성과 가덕도를 향하여 오시(午時=111~12시)에 옥포앞바다에 이르고 적의 동태를 살폈다.
이순신 장군은 적의 진영을 살피며 전열을 가다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벼이 움직이지 말라, 태산같이 침착하게 행동하라".(勿令妄動 靜重如山) 그리고 공격의 때가 다가오자 옥포선착장에 정박중이던 50여 척의 왜선을 공격하여 26척을 침몰시켜 단번에 적의 기세를 꺾어버렸다. 기세등등하던 왜병은 이후 이순신 장군과의 전투에서 연전연패함으로써 왜군의 보급선이 한양까지 전해지지 않았고, 그로 인하여 전쟁이 길어지고 겨울이 다가오자 왜병은 추위를 못참고 스스로 죽어갔다.
옥포대첩은 관군으로 또 수군으로 왜적을 패퇴시킨 첫 승전으로 구국의 대첩이었다. 이를 길이 전하고자 1996년 옥포만두에 기념공원을 세우고 기념탑과 참배단 기념관과 사당을 세웠다. 이런 역사적 기념공원으로 잘 가꾸어져있건만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때문인지 넓은 공원에는 바다낚시를 하려는 사람들이 몇 명 보일 뿐 , 한적하기 그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