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해질무렵 국보289호 익산왕궁리오층석탑에 섰다. 노을과 석탑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왕궁리란 지명은 바로 이곳에 옛 마한시대 왕궁이 있던 곳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기자가 어릴 때만 해도 지명이 왕궁리 일뿐 이곳이 왕궁터가 있었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못했다. 대신 왕궁리 낮은 언덕 위에는 오층석탑만이 있었다. 그때만해도 석탑이 있던 절의 이름조차 알 수없는 상태였으나 지금도 절이름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다만, 이 탑이 왕궁리라는 동네에 서있기에 왕궁리오층석탑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은 이렇게 아름답게 잘 지어진 탑이 있건만 지금도 석탑이 있던 절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탑의 역사를 알기 위하여 탑을 완전 해체하여 땅속에 묻혀있던 사리장엄구까지도 발굴조사했지만, 절 이름이 새겨진 기와조각 하나 나오질 않아서, 지금도 왕궁리오층석탑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 탑은 백제계의 조형성을 갖춘 고려시대 초기의 탑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밝혀진 탑의 내력이다. 백제시대 석탑양식은 근처에 있는 익산 미륵사탑과 부여 정림사지석탑과 비슷하기에 그렇게 보는 것이고, 돌을 마치 나무로 집을 짓듯이 기둥모양과 처마에는 서까래 모양도 새기고 고려시대에 접어들어 5층석탑이 많이 조성되었기에 이 탑이 고려시대 탑으로 본 것이다.
그럼 왕궁은 어디에 있었을까? 왕궁이었다면 궁궐을 둘렀던 높은 궁장도 있었을 것이고, 그 궁장 안에는 많은 전과 각으로 된 건물의 초석도 있었을 것이며, 궁궐의 지붕을 덮었던 기와도 있었을 것인데, 왕궁리 근처 어디에도 그럴만한 땅이 보이질 않았고, 석탑의 주변에는 왕궁의 흔적이 없었다.
그래서 지표조사를 한 뒤 대대적으로 석탑주변을 발굴조사를 해보니, 왕궁은 이 탑이 있던 절 아래에 까마득히 묻혀있었다. 마한은 백제가 들어선 뒤 100년 대인 2세기까지 있다가 백제에 편입된 나라이다. 마한의 왕조가 백제로 편입되고 이후 백제까지 망한뒤 이곳은 폐허가 되었다. 그리고 수백년 세월이 흐르고 보니, 사라진 왕궁터에는 흙먼지가 날아와 쌓여서 땅이 많이 높아졌다.
그러자 궁터는 잡초가 우거지고 그곳을 개간하여 밭농사를 지었을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고려가 들어선 뒤, 이곳이 좋은 터였음을 안 스님들이 절을 지었고, 그래서 탑은 궁궐터보다 2m 정도 높아진 땅위에 들어섰던 것이다.
지금은 왕궁리오층석탑 옆에 왕궁리유적전시관이 들어서, 이곳에서 발굴된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이곳에 절이 있었고, 또 절이 들어서기 수백년 전에는 왕궁이 있었다니, 땅속에 묻힌 역사의 흔적과 왕궁리오층석탑을 보며, 석양에 빛나는 석탑의 모습이 그저 아름답게 보이기 보다는 아련한 역사속에 살다간 사람들이 떠올라 애틋하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