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강화도령 철종(조선 25대왕)의 예릉이다. 철종은 1831년 태어나 1863년 33세에 승하하였다. 그는 1844년 14세 되던 해 그의 형인 회평군이 옥사함에 따라 온 가족이 강화로 유배되어 몰락한 왕가의 자손으로 평범한 농촌의 총각으로 살았다. 그러다 1849년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 의 명으로 궁궐로 들어와 덕완군으로 책봉되었다가 제24대 헌종의 뒤를 이어 제25대왕이 되었다.
그를 궁궐로 불러들인 순원왕후는 조선 후기 세도정치를 이끌던 안동김씨 가문에서 김조순의 큰딸로 태어나 순조의 왕비가 되었다가 헌종과 철종에 걸쳐 수렴청정을 하면서 안동김씨가의 규수를 왕비로 책봉하였고, 그 안동김씨의 권력독식으로 조선의 온갖 부패가 만연하여 안동김씨에 줄을 서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난 선비요 학자라도 쓸모가 없었고, 안동김씨에 줄만 대면 지방의 관리부터 중앙의 요직까지 하지 못할 일이 없었다. 그런 조선후기의 국정을 문란게 하는데 큰 공헌(?)을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때 조선에는 김삿갓이 나타나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삶을 쉬운 시로 풀어내면서 관리들의 비리를 고발하였다.
안동김씨는 이씨 왕손중 훌륭한 사람을 택해서 국정을 잘 다스리도록 하는 것은 결국 안동김씨의 독재 정권을 잃는 것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왕의 왕손중에서 택하되 권력만은 자신들이 좌지우지 하기 위하여 선대 왕의 후손 중에서 별 볼일 없는 인물을 택하여 후대의 왕으로 앉혔다. 대신 왕의 부인인 왕비는 안동김씨의 최고권력자 집안의 여자를 들임으로써 왕비의 아버지(부원군)와 그 일가 친척들인이 국정을 휘어잡고 온갖 못된 일을 저질렀다.
철종 또한 어린시절 형의 옥사로 인하여 강화도로 온 가족이 귀양을 가서 왕손이면서도 체계적인 공부를 배우지도 못하고 근근이 농촌에서 농사지으며 살면서 한낱 촌부가 되어 19세까지 살았다. 그런데 갑자기 헌종이 세상을 떠나자 헌종의 뒤를 이을 후왕으로 배운 바 없고 친인척이 없는 강화도령이 안동김씨의 눈에 띄게 되어 졸지에 촌부가 왕으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배운것도 없고 주변에 보살펴주어야 할 종친도 없는 상태의 철종은 왕비을 중심으로 한 외척이 계속해서 권세를 휘두르기에는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궁으로 들어와 왕이 되었고, 왕대비와 대왕대비가 간택한 규수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그녀는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김문근의 딸이었다. 그렇게 왕비를 들임으로써 연속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이어질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조선은 온갖 부정과 비리가 판치는 세상이었다. 특히 그 중심에는 왕비와 왕대비 대왕대비 등으로 이어지는 왕의 외척들의 세도정치가 극성을 부려 국가의 세금도 줄만 잘 서면 내지 않고, 거두어 들인 세금은 관리들이 착복하였으니, 국고는 비고 백성들은 온갖 착취에 굶주림으로 신음하였다. 왕의 외척인 안동김씨 집안의 솟을 대문 앞에는 줄을 서서 뇌물을 바치는 사람이 끊임이 없었으나, 국고는 빈약하고 백성들은 신음하였다.
이렇게 세상이 살기 어렵게 되자,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함경도 지방에서는 홍경래가 경기도지방에서는 임걱정이 전라도 익산지방 봉기, 경상도 진주민란등이 일어나 살기 어려운 백성들의 원성이 들끓었다. 한편 국외에서는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학(천주교)이 현실에서의 고달픈 삶을 내세의 구원에라도 의지하면서 살고자 하였다. 그래서 모르게 전파된 천주교는 많은 사람들이 삶의 안식처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때 최재우는 한민족이 본래 민본사상에 연유한 동학을 창시하고 후천개벽을 선언하였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조하여 동학이 급속도로 퍼지자, 조정은 백성을 선동하여 한양으로 몰려들까 긴장하였고, 결국 동학의 교주인 최재우를 혹세무민의 죄를 뒤집어씌워 잡아서 효수하였다. 그러나 살기 힘든 백성들은 그에 의지하거나 서학(천주교)에 의지하거나 그도 아니면 살던 동네를 떠나서 산적이되거나 도둑이 되었다.
강화도령 철종은 배운 바가 없고 돌보아줄 종친도 없는 상태에서 안동김씨 외척에 둘러싸여 임금다운 정치는 해보지도 못하고 살다가 33세 되는 해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왕은 안동김씨의 세도를 꺾기 위해서 흥선대원군을 발탁한 대왕대비 신원왕후(추존 익종의 비로 풍양조씨 조만영의 딸)가 극비리에 선택한 명복(왕이 되기 전 이름으로 흥선대원군의 2남)이 조선 26대 고종이 되었다. 신원왕후는 풍양조씨 조만영의 딸로 안동김씨의 폐해를 누구보다 절감하던 차에 후왕으로 낙점할 인물을 선택할 권한이 대왕대비인 신원왕후에게 있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 왕은 인물 자체가 왕재로서의 공부와 수양을 하지 못하여 왕답지 못하고, 대신들은 모두 외척의 손에 놀아나 힘도 쓰지 못하고, 세계는 급변하는 상황에서 조선의 하루 하루는 태풍 앞에 외로운 등불이었다. 강화도로 유배가 그냥 그곳에서 살았으면 평범한 농부로 살았을 철종의 능(예릉)에서 조선시대 후기 국정의 문란을 되새기며, 과연 왕조시대가 아닌 민주국가 대한민국에서 지금은 정치가 국민을 편안게 하고 있는지, 아니면 여전히 문란의 연속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