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15 (일)

  • 구름많음동두천 17.6℃
  • 맑음강릉 20.3℃
  • 구름많음서울 18.2℃
  • 맑음대전 18.5℃
  • 맑음대구 19.0℃
  • 맑음울산 20.0℃
  • 맑음광주 18.4℃
  • 맑음부산 19.1℃
  • 맑음고창 18.4℃
  • 맑음제주 21.3℃
  • 구름많음강화 15.3℃
  • 구름조금보은 17.3℃
  • 맑음금산 18.1℃
  • 맑음강진군 18.7℃
  • 구름조금경주시 20.7℃
  • 맑음거제 19.7℃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사진나들이

[화보] 한민족의 뿌리역사를 되찾자 !!! 역사광복을 꿈꾸며

개천절 민족 공동행사장에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민족(배달겨레)이 근세 조선왕조에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면서 조선은 청나라와의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독립황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 독립하기 위함이 아니고, 일제가 한국땅을 집어삼키기 위한 술책에 놀아난 것이었다.


조선이 청나라에 상국으로 모시는 사대를 지속한다면 조선을 식민지 속국으로 삼고자 할 때 마다 상국인 청나라가 기득권{?}을 주장하며 간섭하겠기에, 이를 근본적으로 차단하기 위하여 일본은 조선의 왕이었던 고종에게 청나라 제후에서 벗어나 독립된 황제국이 되기를 권유하였다. 이에 고종은 1897년 조선이란 국호를 버리고 한(韓)이라는 우리민족의 옛날 국가인 만주지역에 있었던 마한 번한 진한 명칭을 찾아내 그 공통점인 한(韓)을 국호로 정하여 황제국으로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이 없는 상태에서 이름만 바꾼다고 당장 황제국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대한제국은 황제국으로 선포했으나, 그동안의 구태와 악습을 타파하는 자체적인 개혁을 하지 못하고 기득권층 안에서 세력을 잃지 않으려는 내분에 세월을 허송하다가  결국 외세를 끌어들여 스스로 패망의 길에 접어들었다. 지도자들은 스스로 개혁 대신 청나라 일본 러시아 등 이미 근대화를 이룩한 나라들에 의지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에 급급하였고 백성들은 더욱 더 고난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리고 결국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자 뜻있는 사람들은 정든 땅을 벗어나 해외로 망명하여, 망명정부를 세우고 그곳에서 노동과 농사를 지어가면서 사라져버린 조국을 되찾겠다고 나섰다.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에 병합되어버리고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9년 동안 한민족은 나라의 이름이 없이 살아야 했다 그러자 해외로 나간 한민족은 1919년 삼일독립선언을 계기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사라진 나라의 복원에 나섰다.


그래서 1919년은 대한민국 원년이 되었다. 그러니까 한민족이 나라없는 시대를 살았던 것은 1910년 부터 1919년까지 9년 동안 뿐이다. 일제강점기에도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엄연히 존재하였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망각하고 한민족이 일제 35년 동안 완전히 나라없는 민족으로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목숨바쳐 지켜낸 선인들에 대한 모독이 된다. 그들은 기꺼이 목숨을 바쳐가면서 한민족의 나라를 잇고자 하였건만, 어찌 후손의 도리로서 그 처절하고 숭고한 뜻을 깎아내릴 수 있다는 말인가.?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들은 국내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살았고, 나라 팔아 얻은 재산으로 자식들은 해외로 유학보내 각종 신진학문을 습득하였으나, 독립운동에 나섰던 선조들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전 재산을 다 날리고, 일본군과 싸우다가 목숨마저 잃은 경우가 너무도 많았다.  그래도 불평하지 않고 기꺼이 나섰다.


지금와서 되돌아보면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들이 저지른 못된 짓이 제 민족의 역사를 깡그리 없애버리는데 앞장섰던 것이니 이 보다 통탄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한민족(배달겨레)은 본래 반만년 전 만주를 기반으로 나라를 세우고 홍익인간과 제세이화를 꿈꾸던 민족이었건만,  한민족의 역사 무대를 한반도 이남으로 국한시켜, 옛 역사를 모조리 전설과 신화로 둔갑시켜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만이 오로지 변할 수 없는 진리인양 체계화하여 온 한민족을 세뇌시켜버린 것이다. 그동안 수천년동안 한민족의 구심점은 단군이지만, 단군은 곰의 자식으로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이라 폄하하였다. 일제가 물러간 뒤에도 많은 한민족의 선각자들이 조상의 역사를 되살리고자 애써왔으나, 철벽과도 같은 강단사학자들에 번번히 패하고 말았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에 한민족의 역사를 제대로 밝혀야 한다는 학자들이 역사학의 방계에서 일기 시작하였다. 거기에는 민속학 비교문화학 신화학 언어학에 연구하던 학자들과 신진역사학자들도 합세하고 있다. 이들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책을 세우라는 동북아 역사재단의 중국주장에 추종할 뿐 아니라, 스스로 중국의 동북공정을 정당화 시켜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하늘에서 떨어진 학문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간 자취를 밝혀내는 학문이다. 따라서 역사는 사람의 역사를 밝히기 위하여 고고학 자료와 문헌자료와 기타 인문자료들을 종합하여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 당연할 것인데도 기존 강단사학자들은 지금 세워진 정설만이 근대역사학을 연구한 학자들의 업적으로 진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의 역사를 되돌아 본다면 그런 주장은 허구에 불과하다. 역사는 책에 쓰여진 것만이 아니라, 지하에 묻혀있는 유물들이 발굴되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쓴 역사책이라 하더라도 그 오류를 수정하여 바로 잡는 것이다. 그렇게 바뀐 것이 현재의 세계사이다.


 서양의 역사속에서 트로이목마의 이야기는 옛날부터 있어왔지만 그것은 한낱 신화로 여겨져왔다. 그러다가 지하에 묻혀있던 유물이 출토되자 그것은 신화가 아니고 역사임이 밝혀졌다. 뿐만이 아니다. 불과 50년 전만 해도 중국의 고대역사인 하나라 은나라 는 신화속의 역사였다. 그러나 은나라의 수도였던 은허에서 귀갑들과 거기에 쓰여진 글자들을 해독해보니, 은나라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근래 만주 홍산지역에서는 새로운 문화유적이 대대적으로 발굴되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발굴유물들을 분석해보면,  홍산지역에서 발굴되는 유물들은 중국 황하문명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들로 한민족의 역사를 밝혀줄 수 있는 단서들이 너무도 많이 있다. 그런 유물이 발굴되고 있음에도 어찌된 일인지 한국의 사학계는 강건너 불구경하는 듯 보인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한민족의 고대사를 다시 써야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면서, 그것이 한민족과 아무 관계없는 중국의 일이라고 미리 담을 치고 나서는 형편이다.


홍산문화를 바탕으로 일으킨 문화의 주인공이 과연 한민족 배달겨레와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것인지 눈에 불을 켜고 살펴보는 것은 역사학자가 아니라도 한민족의 한 사람으로라도 크게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역사를 잃은 민족이 된 오늘에 한국인들이 밝혀야 할 한국인의 옛역사를 밝히는데 어찌 이리도 관심이 적은지 못내 안타깝기 그지 없지만, 이제라도 한민족의 역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행동에 나섰다는데 의미를 찾고 싶다.


단기 4349년 하늘이 열린 개천절날 광화문 광장에서.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