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에게 의정부 원효사에 있는 조선7층석탑(이하 7층석탑)의 유래를 설명해준 분은 홍종필 (82살, 오키나와연구소장) 소장이었다. 홍 소장은 대마도에 있던 7층석탑이 원효사 대웅전 앞뜰로 옮겨 오기까지의 전 과정을 소상히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고국으로 귀환하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 분이다.
어제(28일) 설 명절을 맞아 기자는 의정부 원효사(경기도 의정부시 망월로 28번길 356)엘 다녀왔다. 수십 년 동안 집에서 차례를 모시던 부모님을 원효사에서 합동 차례로 모시기로 하고 원효사에 첫 걸음을 한 날이었다. 원효사는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원효대사께서 머무르며 수도했던 도량으로 알려진 곳으로 1626년(조선 인조 4년)에 만든 한글판 <묘법연화경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6호)>이 발견된 바 있는 도봉산 중턱에 있는 청정도량이다.
7층석탑은 대웅전에서 종무소로 내려오는 계단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옆에는 원효대사 동상도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7층 석탑의 모습이 낯익은 모습이 아니라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불탑에 문외한이라고는 해도 한국인이라면 충주 탑평리 7층석탑이라든가 경주의 다보탑 석가탑 등 균형미 있는 아름다운 탑을 보아온 터라 원효사 앞뜰의 7층석탑이 썩 익숙지 않은 형태라는 것쯤은 알 수 있다. 순간 “혹시 일본탑?” 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과 달리 목탑이 주종을 이루고 있어 일본탑이라고 보기도 어려워 종무소에 들러 주지스님께 여쭤 보았다.
“그게 말입니다.” 주지스님은 식혜와 한과를 예쁘게 담은 다탁을 기자 앞에 내밀며 원효사 대웅전 앞뜰에 서있는 7층석탑에 대한 사연을 들려주었다.
“이 7층석탑은 조선에서 대마도로 갔다가 우리 절로 오게 된 것입니다. 더 자세한 것은 잠시 뒤에 홍종필 교수님이 우리 절에 오실 거니까 만나보시지요.”
기자에게 대마도에 있던 7층석탑이 원효사로 돌아오기 전까지의 유래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준 홍종필 소장은 주지스님으로부터 대충 7층석탑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만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홍 소장님은 이 절의 오랜 신도로 대마도에서 7층석탑을 만났을 때 이 석탑을 원효사로 옮길 생각을 하고 주지스님과 상의를 했다고 했다.
“2003년 3월 10일, 제가 이 7층석탑을 대마도 미키코진(三木公人)씨 저택 정원에서 보았을 때 아! 한국에 있어야할 탑이 일제강점기에 이곳에 옮겨왔으니 원래 있었던 한국으로 귀환시켜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차 한 잔을 나누며 홍 소장과 긴 대담이 이어졌다.
조선통신사 연구의 권위자로 일본에서 교수를 역임한 홍종필 소장이 대마도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89년 8월 2일 대마도에서 열린 조선통신사 심포지엄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게 되면서 부터다. 그때 학술회의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던 오오구시 요시미(大串嘉見) 사장을 알게되는데 오오구시 씨는 쓰시마호텔 대표로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대마도를 찾는 관광객들이 늘어나자 호텔도 번창하여 오오구시 씨는 호텔 주차장을 위해 대저택인 옆집을 사들이게 되었다.
7층석탑은 바로 그 저택(나가사키현 쓰시마시 이즈하라쵸 오오테바시 1041)의 정원에 있었다. 저택의 주인은 미키코진(三木公人)으로 그는 이 7층석탑이 대마도의 번주(藩主)였던 소요시토시(宗義智, 1558~1615) 가문이 1910년을 전후하여 전라북도 서남부 지역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증언했다고 했다. 쓰시마호텔 사장은 저택을 헐기 전에 7층석탑을 한국으로 귀환시키고자 노력했던 홍종필 소장을 기억하고 홍 소장에게 7충석탑의 한국 귀환을 주선하게 된다.
꿈에도 그리던 7층석탑을 한국으로 봉안할 기회를 잡은 홍 소장은 단걸음에 대마도로 건너간다. 그리고는 오오구시 사장으로부터 기증을 약속받았다. 2004년 3월 3일의 일이었다. 그러나 7층탑의 높이가 246센티나 되는데다가 돌의 무게도 상당하기에 금방 호주머니에 넣어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운반에 대한 만반의 준비 등이 필요하여 홍 소장은 서둘러 귀국했다. 돌아와 한국의 원효사로 봉안해 올 준비를 하는 차에 쓰시마호텔 사장으로부터 주차장이 협소하여 저택을 헐고 빨리 주차장으로 써야한다는 전갈을 받게된다.
그때 오오구시 사장의 제안은 러일전쟁(1904~1905)시에 희생된 이들을 위한 “러일우호의 언덕(日露友好の丘)”을 쓰시마에 조성하게 되는데 희생된 이들을 위로할 탑으로 이 7층석탑을 주최측에서 원하니 홍 소장이 양보해주면 좋겠다는 연락을 해와 홍 소장은 아쉽지만 오오구시 사장의 뜻대로하라는 답을 했다고 한다. 2004년 10월 29일의 일이다.
그 뒤 홍 소장은 다시 대마도를 찾아 오오구시 사장과 함께 7층석탑을 옮겼다는 도노사키(殿崎)에 있는 “러일우호의 언덕”에 가보았다. 그런데 아뿔사! 어찌 된 것인지 7층석탑이 보이질 않았다. 홍 소장과 오오구시 사장은 공원 안을 샅샅이 뒤졌으나 탑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놀란 두 사람은 이 7층석탑을 “러일우호의 언덕(日露友好の丘)”에 제공하겠다고 중간에서 다리를 놓은 야마다(山田) 씨를 찾아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이 7층석탑을 개인에게 팔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2004년 12월 15일의 일이다.
이 사실을 안 오오구시 사장과 홍 소장은 야마다 씨와 이 7층석탑을 사간 사람을 대상으로 소송을 거는 한편 탑을 사간 사람을 설득하는 등 만 4년여의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2008년 5월 16일 탑을 오오구시 사장이 되찾아오게 되었다. 말할 수 없는 기쁨의 순간이었다. 한편 의정부 원효사에서는 이제나 저제나 7층석탑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던 터였다.
그리하여 그해(2008년) 12월 8일 오오구시 사장은 원효사에 기증한다는 기증서를 써서 대마도 당국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주어 이 7층석탑은 2008년 12월 10일 드디어 하카다항(후쿠오카)에서 뉴카멜리아호를 타고 4일간의 항해를 한 끝에 부산항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어 부산에서 이틀간의 운송을 거쳐 원효사에 도착한 7층석탑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으며 2009년 8월 2일 성대한 봉안식을 거쳐 오늘 우리들 앞에 우뚝 서있게 된 것이다.
원효사는 도봉산 중턱의 가파른 산중턱에 자리하고 있어 홀몸으로 걷기에도 숨이 턱턱 차오르는 곳인데 7층석탑(해체 운반)이 대마도로부터 그 험난한 여정을 거쳐 이곳에 봉안되었다고 생각하니 탑 앞에 서 있기만 해도 고개가 수그러든다. 더군다나 일제강점기에 고국을 떠난 불탑이 대마도 저택의 정원에 장식용으로 놓여있었다는 사실도 가슴이 미어지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 7층석탑의 문화재 지정을 위해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만 어려움이 많습니다.” 문화재 지정의 어려움에 대한 과거 경험을 갖고 있는 기자로서는 그 까다로운 절차 등이 떠올라 주지스님이 말끝을 흐리는 것이 무엇을 말함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 석탑이 언제 건너간 것인지, 제작연대는 언제인지 등에 관한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아는 분들이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홍종필 소장이 보았다던 조선에서 찍은 이 7층석탑의 흑백사진만 발견되어도 이 탑의 비밀은 풀릴 것이라고 본다. 하루속히 탑에 관한 소상한 정보가 나와서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