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용지 크기의 흑백 사진 한 장에 눈이 사로잡혔다. 형무소 담장에 전시되어 있는 순국선열들의 사진 중에 하나. 처음 들어본 낯선 이름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한 참을 서 있었다. 교과서에서 배우지도 어떤 책에서 읽어본 적도 없는 이름, 강우규 의사. 의사(義士)라고 하면 의로운 일을 한 선비라는 뜻이 아닌가?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처럼 그의 이름 뒤에도 의사라는 존칭이 붙어있었다. “65세의 나이로 서울역(당시 남대문역)에서 일본 총독 사이토에게 폭탄을 투척했다가 서대문형무소 단두대에서 처형당함.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됨”이라는 간단한 설명을 읽고 가슴이 멍해졌다. 힘없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역력한 사진 앞에서 뭔가에 사로잡힌 듯 한참을 생각에 파묻혔던 것이 5년 전의 일이다.‘어째서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만큼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총총히 독립공원을 산책했던 기억.
그리고, 그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고 도서관과 인터넷을 검색해보아도 그리 많은 자료를 모을 수가 없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 구절,“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처럼 그는 그 후 내 정신 공간에 한 조각이 되었다.
“그랬구나! 그런 일을 한 진주 강(姜)씨 성을 가진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구나!’그것이 전부였다. 다시 그 곳을 찾았다. 지금은 ‘서대문역사문화관’으로 이름을 바꾼 곳이다. 역사관 계단을 올라가면 왼쪽 작은 방에 그가 지은 한시(漢詩)가 있다. 단두대에서 그의 머리통을 몸과 분리시켰을 목줄이 슬라이드로 전시되어 있고.....
“단두대에 오르니 차라리 봄바람이 따스하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그가 단두대에 올라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시라고 한다. ‘연로한 할아버지가 시적 감수성이 뛰어났었나 보다!’고 생각하기엔 가슴이 아려오는 시(詩)의 뒷면이 보이는 것 같다. 그가 갇혀있던 감방은 10사(舍) 하(下) 19호였으니, 얼음장 같이 차가운 지하 감옥에 서 얼마나 추웠겠는지? 단두대에 오르고 나서야 봄볕 한번 쪼였을 그의 시렸던 노구(老軀)를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져온다.
어둡고 외로운 독방에 갇혀 있던 수인(囚人). 취조당하고 고문당할 때만 독방에서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독방에서도 서서 독립만세를 외쳤었다고 하는 기록을 보면, 그의 투쟁이 얼마나 추웠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어느 책자에서 보았던 또 하나의 흑백 사진 한 장 - 굵은 밧줄에 뒤로 손이 묶인 채 단두대로 끌려가는 노구(老軀). 체포당하면서부터 처형당하기까지 시종일관 의기(意氣)와 늠름하고 담대한 태도를 잃지 않았었다는 강 의사(姜義士).
오히려 일본 경찰관들을 꾸짖고 호통을 쳤었다는 노인. 요즘은 의학이 발달하여 65세의 나이의 분들도 건장하지만, 그 당시는 매우 연로했을 것이라고들 한다. 그런 고령의 나이로 왜 그는 그런 일을 했는지 아직도 의문이 풀리질 않는다.
그분이 폭탄을 투척한 것은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였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삔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이 1910년 10월 26일이었다. 안 의사의 의거 후 10년 후의 일이었으며 기미 3∙1운동 후 최초로 일어난 의열 사건이었다. 안 의사가 의거 후 총살당한 일이나, 3∙1운동에 참여했던 투사들이 옥고를 치루고 처형된 일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의거를 일으키면 어찌될는지? 어떤 고통의 길이 기다리고 있을지?
어떻게 처형될는지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그였다. 게다가 그는 가난하고 배운 것이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잃을 것이 더 이상 없는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을지 모른다. ‘살만큼 살았으니 죽기 전에 의로운 일이나 한번 하고 죽자’는 심지 곧은 노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과 전혀 다르다.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그만이지”라고 여기며 살아도 될 만큼 그는 부유한 노인이었다.
가난한 집 막내아들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잃고 누나 밑에서 크긴 했지만, 그는 한의학을 공부하여 한의사가 될 만큼 성실한 재원이었다. 20대에 한의사로 30대엔 사업가로 부(富)를 누렸던 그가 어째서 그런 일을 했는지? 자신이 가진 재산으로 배불리 먹고 천수를 누리다가 세상을 떠나도 그에게 돌을 던질 이 아무도 없었을텐데...... 그는 왜 험악한 길을 가고자 했는지?
며칠 전 구 서울역 광장에 세워진 그의 동상을 일부러 찾았다. 겨울 날씨가 추운 게 당연하겠지만, 그날은 더 춥게 느껴졌다. 집에서부터 걸으면 30분, 버스로 10분이면 될 거리임에도 버스를 기다리기가 두려운 추위였다. 택시 아저씨에게 “강우규 의사 동상 앞에서 내려주세요”했더니, “서울역 앞을 그렇게 많이 지나다녔는데, 그런 게 서울역에 있어요?”라고 하셨다. “그러게요. 강우규 의사가 참 추우시겠네요. 이렇게 추운 날에도 거기 서 계셔야 하니.....”라고 하며 강 의사에 대해 택시 아저씨에게 간단히 설명을 해드리고 내렸지만 부끄러운 맘이 몰려왔다. 춥다고 가까운 거리임에도 택시를 탔던 내 자신의 안일함이......
바람이 매서운 겨울날. 舊서울역 광장엔 여전히 지나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중국인 관광객인듯한 여행객 한 무리가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고 지나간다. 평안남도 덕천 출신의 강 할아버지의 거대한 동상이 서울역 광장에 우뚝 서 있다. 동상에는 관심이 없는 듯한 행인들의 발걸음과 르네상스풍의 서울역사(驛舍).
일제 때 스위스 루체른 철도역사(鐵道驛舍)를 본떠서 지었다는 엷은 주홍과 엷은 갈색이 어우러진 일본문화의 잔재 앞에 강 우규 의사는 오늘도 무엇인가를 폭발시키고 싶은 듯이 우뚝 서 있다. 그의 발에 매달려 그의 발걸음에 존경의 마음을 오롯이 올려드려도 될는지? 감히 그래도 될는지?
4호선 서울역 3번 출구에 도포를 휘날리고 서 계신 할아버지. 그의 선택 - 아랫목을 버리고 일어섰던 - 에 대해 우리들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는지? 푹신한 아랫목 보다 단두대의 봄볕을 더 사랑했던 65세의 노인, 강우규 의사. 그는 우리들에게 기억되어야 한다.
강 할아버지는 나라를 사랑했노라고.
지독하게 사랑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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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석
한국방송예술진흥원 졸, SBS 촬영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