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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는 어떻게 탁본(拓本)했을까?

[큐레이터 추천 유물 67]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의 두 번째 서울인 지안[集安]에 세워져 있습니다. 비는 높이 6.39m, 폭 1.35m~2m로, 채석(採石)하고 난 몸돌을 적당히 여기저기 다듬었을 뿐 네모반듯하게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글자를 새긴 비면조차 판판하게 다듬지 않았습니다. 비의 4면에 모두 글자를 새겼는데, 각 면에는 비문이 들어갈 윤곽을 긋고 그 안에 다시 세로로 길게 선을 그어 각 행을 구분하였습니다. 4면에 걸쳐 1,775자가 새겨져 있는데,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세와 고구려의 위치를 상징적으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碑)의 현재 상태는 원래 모습 그대로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건립된 지 천수백 년이 지나면서 자연 마모된 것에 더하여, 19세기 말 재발견된 뒤 표면에 가득 낀 이끼를 제거하기 위해 불을 질렀기 때문에 비면(碑面)이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이후 비면에 석회를 바른데다가, 탁본을 거듭하며 훼손이 계속되었습니다. 1960년대 이후 비면에 대한 화학적 보존처리는 비 상태를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때문에 현재는 비면을 자세히 살펴보아도 본래의 글자[字劃]를 알아보기 힘든 곳이 많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구자들은 비문의 본래 글자[原字] 추구를 위한 자료로서 일찍이 탁본에 주목하였습니다. 비가 재발견된 뒤 50여 년간 집중적으로 생산된 초기 탁본은 비문 연구를 위한 또 하나의 사료가 되었습니다. 특히 탁본을 뜬[採拓] 시기를 알 수 있는 경우 그 중요성은 더욱 높아집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탁본은 탁본을 뜬 시기를 특정할 수 있어 광개토대왕비 탁본 연구에 중요한 기초자료 중 하나입니다.

 

 

 

광개토대왕비 탁본의 종류

 

비문 연구에 이용하는 초기 탁본은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먼저 비문(또는 탁본)에 종이를 대고 글자 둘레에 선을 그린 다음, 그 여백을 진한 먹으로 메워서 탁본처럼 보이게 만든 묵본[雙鉤加墨本, 墨水廓塡本]으로, 원 비면에서 직접 두드려 뜨지 않았다는 점에서 엄밀히 말하면 탁본이 아닙니다. 제작 과정에서 비문의 원 글자를 잘못 판독하여 오류가 생길 가능성이 높지만, 제작 당시 비문의 글자를 어떻게 인식하였는가라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1880년 청(淸)에 파견된 일본 육군 스파이 사카와 카게아키(酒匂景信) 중위가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 바로 이러한 묵본입니다. 이후 일본 육군참모본부에서 5년간 비밀 연구 끝에 1888년 그 결과를 세상에 공표하면서 광개토대왕비문 연구가 본격화되었습니다. 그 주된 관심은 신묘년(辛卯年)조를 중심으로 한 고대 한일 관계사의 측면이었고, 광개토대왕비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왜가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로 강조되었습니다.

 

다음은 비면이 석회 등으로 훼손되기 이전에 비면에 종이를 대고 직접 두드려 떠낸 원석탁본(原石拓本)으로, 현재까지 10여 본(本) 남짓 확인되었습니다. 비문 연구의 가장 핵심적인 자료이지만, 오랜 세월 동안의 마모, 재발견 후 이끼 제거를 위한 방화 등으로 글자들이 많이 떨어져 나가고 흐려져 글자를 읽어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때문에 비문의 원래 글자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석회탁본과의 비교 연구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은 비면에 석회를 발라 글자를 보수한 뒤 뜬 석회탁본(石灰拓本)으로, 현재 남아있는 광개토대왕비 초기 탁본의 대부분이 바로 석회탁본입니다. 석회를 발라 자획을 명확히 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이든 아니든 비문의 글자를 잘못 판독하거나 조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의한 비문 변조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석회를 칠하면서 초기 석회탁본에는 비문에서 행을 구분하던 세로선[縱線]이 사라졌지만, 거듭된 탁본으로 석회가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1930년대 석회탁본 등에서는 비면 위 세로선이 부분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광개토대왕비 탁본은 비의 크기와 상태 등으로 인해 전문 탁공(拓工)이 아니면 탁본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때문에 각각의 탁본에는 탁공마다의 독특한 제작 방법이 남아있습니다.

 

광개토대왕비는 그 크기 때문에 각 면마다 수십 매의 작은 종이[小拓紙]를 이어 붙여 탁본을 할 수 밖에 없으므로, 종이의 크기와 이어 붙이는 방법 등이 탁공마다 달랐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동일한 수법에 의한 탁본들을 분류하여 묶고, 이를 시기가 명확한 탁본들과 견줘 탁본을 뜬 연대를 추출해 낼 수도 있습니다.

 

광범위하게 제작ㆍ유포된 석회탁본은 그 양만큼 다종다양한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를 식별하고 분류하는 것은 비문 연구의 중요한 작업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장 탁본 현황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탁본은 각 비면마다 하나씩 모두 4개의 두루마리 형태로 장황되어 있습니다. 탁본 뒷면을 두 번 배접한 뒤 비단 장정을 했습니다.

 

Ⅰ면 탁본은 세로 543㎝, 가로 140㎝로, 소탁지(小拓紙) 1매는 세로 73㎝×가로 47㎝, 재질은 닥종이[韓紙]입니다. 소탁지는 가로 4열(列)×세로 8단(段)으로 접합하였는데, 마지막 4번째 열의 소탁지는 남은 비면의 크기에 맞춰 작게 잘라 붙였습니다. 모두 32장의 소탁지를 사용하였습니다. Ⅱ면~Ⅳ면의 탁본에 사용한 소탁지의 기본 크기도 Ⅰ면과 모두 같습니다. Ⅱ면 탁본은 세로 547㎝, 가로 132.5㎝로, 소탁지는 가로 3열×세로 8단으로 접합하여 모두 24장을 사용하였습니다.

 

Ⅲ면 탁본은 세로 542.5㎝, 가로 186㎝로, 소탁지는 가로 4열×세로 8단으로 접합하였는데, 마지막 8단은 4장이 아닌 6장을 사용하여 모두 34장을 사용하였습니다. Ⅳ면 탁본은 세로 543㎝, 가로 140㎝로, 소탁지는 기본적으로 가로 3열×세로 8단으로 접합하였습니다. 다만 오른쪽 3열의 경우 Ⅰ면~Ⅲ면을 탁본한 뒤 남은 종이를 활용한 듯이, 2ㆍ3ㆍ5ㆍ7단에서 2장을 나란히 연결하였고, 마지막 8단은 기본 소탁지를 세로방향이 아닌 가로방향으로 붙여 3장이 아닌 2장으로 마무리하였습니다. 모두 27장을 사용하였습니다.

 

Ⅳ면 탁본을 뜨면서 자투리 소탁지를 많이 활용한 것으로 보아, 탁본은 Ⅰ면부터 Ⅳ면까지 차례로 떴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소탁지를 연결하는 방법은Ⅰ면~Ⅳ면 모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일정하게 붙여나갔으며, 겹친 너비는 2㎝~4㎝로 일정하지는 않습니다. 상ㆍ하, 좌ㆍ우 인접한 네 종이가 한 곳에서 접합되지 않도록 소탁지를 조금씩 엇갈려 붙였는데, 4장의 종이가 접합된 곳은 글자를 탁출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탁본 중간 중간에 채탁 작업 중 찢긴 부분을 보수한 흔적이 확인됩니다.

 

이 탁본은 세로의 괘선이 확인되지 않고, Ⅰ면 3행 41자가 ‘黃’<원래 글자는 履>으로 탁출되는 등 석회탁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타 석회탁본과 달리 옅은 묵으로 글자가 확인되지 않는 부분까지 비의 거의 전면을 골고루 착묵(着墨)하고 있어 차이를 보입니다.

 

 

 

소장 탁본의 제작연대

 

이 탁본은 조선총독부박물관이 1918년 11월 5일에 유카와(祐川寧吉)에게 10엔에 구입한 것으로, 적어도 탁본이 만들어진 연도는 1918년 이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Ⅲ면 1행 전체가 탁본되지는 않았지만, 두 글자(27번째 글자, 41번째 글자)가 명확히 확인되며, 특히 Ⅲ면 1행 41번째 자를 별도의 작은 종이[小拓紙]에 탁본한 것으로 보아, 탁본을 뜰 당시에 Ⅲ면 1행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13년 세키노 다사시(關野貞) 일행이 광개토대왕비를 현지 조사할 때 그 동안 석회탁본에서 거의 탁출되지 않았던 Ⅲ면 1행이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이 탁본은 1913년 이후에 만들어진 탁본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광개토대왕릉비 탁본은 1913년~1918년 사이에 뜬 것으로, 소탁지의 기본 크기가 종래 확인된 석회탁본과는 다르며, 공백이 없이 비면 전면에 골고루 먹을 친 착묵 방식 등 종래 확인된 석회탁본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어 주목됩니다.

 

광개토대왕비 본래 글자[原字]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초기 원석탁본과 다종다양한 석회탁본의 견줌 연구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각 탁본들의 특징을 추출하여 식별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는 작업이 필수적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석회탁본은 다른 탁본과의 식별 기준이 되어 그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 국립중앙박물관(최장열) 제공

                                위 내용과 자료는 국립중앙박물관의 허락 없이 가져가실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