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수행기》는 1833년(순조33) 공청우도(公淸右道, 오늘날 충청남도) 암행어사로 활동한 황협(黃 , 1778~1856)이 남긴 보고서를 필사한 책입니다. 이 책에는 19세기 초반 공청우도 관리들의 업적과 잘못을 비롯하여 백성의 생활상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게 남아 있습니다. 책 제목에서 ‘수(繡)’는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또 다른 이름인 ‘수의(繡衣)’를 뜻합니다. 제목 옆 ‘경랍(庚臘)’이라는 글씨와 책 안의 “경자년 납월 초칠일(庚子臘月初七日)”이라는 기록으로 1840년(헌종6) 무렵 편집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황협, 55살에 암행어사가 되다 《수행기》를 남긴 황협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황협은 1825년(순조25) 47살에 이르러서야 문과에 급제해 벼슬살이를 시작했고 이후 공충도사(公忠都事), 홍원현감(洪原縣監),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등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지냈습니다. 1832년(순조32) 11월에는 비변사(備邊司)로부터 암행어사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추천을 받습니다. 황협은 55살인 1833년 1월 7일 임금으로부터 공청우도 암행어사로 삼는다는 봉서(封書) 1통, 어사의 임무를 적은 사목책(事目冊) 1통,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청동기시대 토기’ 하면 민무늬토기를 떠올립니다. 무늬가 가득한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에 대비되는 말로 청동기시대 문화를 상징합니다. 한반도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5세기 무렵 시작됩니다. 금속이 새롭게 출현하는 시기라 ‘청동기’라는 시대 명칭이 붙었지만 시대 전반에 걸쳐 많은 양이 출토된다는 점에서 민무늬토기가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청동기시대를 ‘민무늬토기시대’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니까요. 이처럼 청동기시대 연구에서 토기는 기본이면서 가장 중요한 과제이기에 끊임없이 다루어져 왔고 많은 연구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청동기시대 토기는 정말 무늬나 색깔이 없을까? 민무늬토기는 넓은 의미에서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모든 토기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대개 좁은 의미에서 거친 바탕흙의 토기, 곧 정선되지 않은 바탕흙으로 빚고 거칠게 다듬은 뒤 800도 이하의 낮은 온도에서 구워낸 적갈색 또는 황갈색을 띠는 토기를 말합니다. 민무늬토기는 무늬가 없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청동기시대 유적에서는 무늬를 내거나 색을 입힌 토기들이 발견됩니다. 점토를 붙이거나 도구를 사용해 새기거나 눌러 장식한 신석기시대 토기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신구법천문도(新舊法天文圖)’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 <성좌도>는 하늘의 별자리를 그린 천문도 병풍입니다. 작품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동양에서 예부터 사용해 온 전통 천문도와 서양에서 새롭게 들어온 신식 천문도가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 조선 초기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에 견줘 새로운 지식을 담고 있어서 서양 천문도를 ‘신법천문도’라 부릅니다. 한국의 옛 그림이나 책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내용이 진행됩니다. 이 병풍의 그림도 오른쪽 위에서 시작하여 왼쪽 아래에서 끝납니다. 가장 오른쪽에는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한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를 그렸습니다. 조선시대 ’천상열차분야지도‘는 크게 세 가지 판본이 존재합니다. (태조 석각본, 선조 목판본, 숙종 복각본과 그 탁본)이 천문도에 그려진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숙종 때에 돌에 다시 새긴 복각본 또는 그 탁본을 기초로 교정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 옆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본래 서운관(書雲觀)이 소장하고 있던 각본이다. 우리 태조 조에 평양에 있는 옛 판본을 바친 것이 있었다. 임금(태조)께서 이를 보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