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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창이 상형문자로 쓴 〈어(魚)ㆍ거(車)ㆍ주(舟)〉

작은 힘이라도 합쳐야 독립의 염원을 이룰 수 있다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 124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어ㆍ거ㆍ주〉는 3‧1만세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이자 근대 한국의 대표 서예가인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의 1929년 작품입니다. 오세창은 화면 가운데에 물고기[魚]ㆍ수레[車]ㆍ배[舟]를 뜻하는 세 글자를 상형문자로 쓰고, 그 옆에 글자들의 뜻을 작은 글씨로 적었습니다. 글의 마지막 부분에는 오세창의 인장 ‘수양(首陽)’, ‘위로고흥(葦老高興)’, ‘와전산방(瓦全山房)’이 찍혀 있습니다. 언뜻 보면 그림 같고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어ㆍ거ㆍ주〉에는 사실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오세창, 민족의 어른이 되다 오세창은 1864년(고종1) 역관(譯官) 오경석(吳慶錫, 1831~1879)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가업을 이어받아 1879년(고종16) 역과(譯科)에 급제했고 중국어 역관으로 활동했습니다. 또 1886년(고종23) 박문국(博文局) 주사(主事)로 근대 신문 <한성주보(漢城周報)>의 발간에 참여했고, 갑오개혁 이후 관직에서 물러난 뒤로는 언론인으로서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오세창은 1910년 국권을 강제로 빼앗겼을 때 일제가 내린 작위와 은사금을 받지 않았고, 1919년 민족 대

내 붓, 내 뜻을 병마가 꺾을쏘냐?

검여 유희강이 쓴 <행서시고>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 122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한 인물이 앉아 있습니다. 그는 붓을 잡고 있습니다. 두꺼운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데, 붓을 잡은 손을 보니 흔히들 쓰는 오른손이 아닌 왼손입니다. 이제 그는 갈아놓은 먹물이 담긴 벼루에 붓을 쿡 찍습니다. 곧이어 툭툭 찍듯이 획을 시작합니다. 달 ‘월(月)’ 자가 나타나는가 싶더니 금세 비슷할 ‘사(似)’ 자와 붉을 ‘단(丹’) 자, 그리고 팔을 튕기듯 움직여 빛 ‘광(光)’을 만듭니다. 그렇게 그 인물은 오직 왼손에 쥔 붓 하나로 칠언(七言) 연구(聯句) 하나를 써냈습니다. 달은 불그레한 빛을 띠며 높은 고개서 나오고 月似丹光出高嶺 학은 매화나무가 있기에 앞산에 머무르는구나 隺因梅樹住前山 청나라 때 대학자 완원(阮元, 1764~1849)이 항저우[杭州] 갈림선원(葛林禪院)에 써 붙였다는 구절입니다. 그러고는 작은 붓을 들어 다시금 먹을 묻히고, 큰 글자 옆에 작은 글씨로 낙관(落款)을 하나하나 적어 내려갑니다. 이 일련(一聯)은 시의 경지가 매우 높아 마치 우아한 사람을 대하며 그림을 읽는 것만 같다. 마침 초우(艸禺) 선생이 글씨를 부탁하기로, 검여(劍如)가 이에 응한다. 此一聯 詩境極

‘아기 부처’라 불린 신라의 불상

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 12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주 남산에 가면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걸친 다양한 불상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남산에 본격적으로 불상이 조성된 것은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 이후입니다. 이 가운데에서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은 이른 시기인 삼국시대에 조성된 불상입니다. 1924년 남산 북쪽, 장창곡 가까이 있는 석실(石室)에서 불상 한 점이 발견되었습니다. 불상 양쪽에 나란히 있었던 두 보살상은 이미 산 아래 민가로 옮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불상과 두 보살상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 분관으로 옮겨졌고,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 신라미술관 불교조각실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불상에 담긴 이야기 장창곡 삼존불상은 《삼국유사》 「생의사석미륵(生義寺石彌勒)」에 등장하는 생의사 미륵세존으로 추정됩니다. 644년(선덕여왕 13) 생의 스님이 꿈속에 찾아온 미륵을 남산 골짜기 땅속에서 찾은 뒤, 삼화령 위에 석조미륵상을 봉안하고 그 자리에 생의사를 창건했다고 합니다. 또한 이 미륵불상은 《삼국유사》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에서 충담 스님이 해마다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공양했던 남산 삼화령 미륵삼존으로 여겨지기도 합

바다로 나간 신석기시대 사람들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 120 - 배 모양 토제품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흙을 빚어 구우면 단단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원리로 토기를 만들고 자기 몸을 꾸미는 장신구나 예술품을 다양하게 만들었습니다. 신석기시대 예술품은 사람의 얼굴이나 여성의 몸, 동물 등을 본떠 사실적인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미적 감각의 표현을 넘어 집단의 신앙ㆍ의례와 관련되거나 소속, 사회적 신분 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부분 크기가 아주 작아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몸에 지니던 혼신용으로 지니던 부적으로 추정되기도 합니다. 배를 닮은 토제품의 발견 국립중앙박물관 신석기실에서 ‘장식과 예술’을 소개하는 진열장을 보면, 오목하게 만들어진 토기 세 조각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이름을 보지 않고서는 무엇을 본뜬 것인지 맞히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시품의 이름은 ‘배 모양 토제품’입니다. 1969년 부산 동삼동 유적에서 발굴되었습니다. 부산 동삼동 유적은 서울 암사동 유적과 더불어 신석기인들이 오랫동안 머물며 살아온 곳으로, 한반도 신석기시대 문화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동삼동 유적은 조개무지 유적입니다. 조개무지는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들이 쌓여서 이루어졌기

마음을 그려내지 못한 서직수 초상, 이명기ㆍ김홍도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 119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한 명의 선비가 공손하게 서 있습니다. 형형한 눈빛과 당당한 표정이 시선을 끕니다. 머리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평소 집안에서 즐겨 쓴 동파관을 썼습니다. 조선의 선비를 머릿속에 그릴 때마다 이 초상화를 떠올리게 됩니다. 문학과 예술을 즐긴 선비, 서직수 무엇보다 눈이 인상적입니다. 눈의 윤곽에 고동색 선을 덧그려 그윽한 깊이감을 주었으며 눈동자 주위에는 주황색을 넣어 눈빛이 생생합니다. 입고 있는 크림색 도포가 풍성합니다. 소매의 통은 아주 넓고 길이는 손을 완전히 덮을 정도로 깁니다. 지체 높은 양반들의 도포일수록 이처럼 넉넉한 품세를 갖췄습니다. 동정 없이 폭이 넓은 목의 깃, 얌전하게 묶은 가슴의 세조대, 부드러우면서도 형체감을 잘 드러내는 옷의 윤곽선과 주름들, 발목까지 내려오는 전체 옷 길이, 이 모든 것들이 선비의 점잖은 풍모와 잘 어울립니다. 도포 자락 아래로 하얀 버선발을 드러낸 채 고운 돗자리 위에 올라서 있습니다. 눈길이 비켜가기 쉬운 발, 그 하얀 색채가 눈부십니다. 조선의 초상화 가운데 이처럼 신발을 벗고 있는 예는 드뭅니다. 인물이 내뿜는 기백이 화면의 주조를 형성하는 가운데 동파관과 세조대가 이루는 검정의

청자 상감 모란무늬 은테 대접, <금구자기>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 118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아가리(구연부, 口緣部)에 은(銀)으로 테두리를 두른 매우 희귀한 금구자기입니다. 안쪽에는 돋을새김(양인각, 陽印刻), 바깥쪽에는 상감기법(象嵌技法)을 사용하였습니다. 안쪽 중앙에는 밑바닥에 둥그런 원을 새기고 그 안에 꽃을 조각하였지요. 안쪽 옆에는 연당초문(蓮唐草文)을, 입 부분에는 당초문대를 돋을새김하였고 바깥쪽 옆면 세 곳에는 모란을 상감하였습니다. 굽은 다리 굽으로 굽 안 바닥 세 곳에 규석 받침이 있습니다. 안쪽에는 연당초문을 돋을새김하고 바깥쪽에는 모란을 상감하여 안팎에 서로 다른 기법으로 무늬를 새겼는데, 이와 같은 무늬 새기는 방법은 한 면에만 상감기법이 소극적으로 사용되던 시기의 순청자와 상감청자의 혼합 양식을 보여줍니다. 금구자기의 역사 금구자기(金釦瓷器)는 고려와 중국에서 성행하였던 고급 자기로, 여기서 금구(金釦)는 아가리를 금속으로 장식 또는 보강한 것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형태의 금구장식은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며, 전국시대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중국에서 금구자기의 제작이 어떠한 연유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금은기(金銀器)의 사용과 연관하여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고대 금은기는

‘함통6년’ 글씨 새겨진 우리나라서 가장 오래된 쇠북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 117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쇠북[金鼓]의 기원 절에서 의례나 공양시간을 알릴 때 쓰는 쇠북은 원래 전장(戰場)에서 사용된 악기의 일종이었습니다. 《사기(史記)》, 《손자(孫子)》,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에는 쇠북이 전장에서 사용된 징과 북이라고 기록고 있어, 원래는 전쟁에서 신호를 보낼 때 사용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쇠북이 불교에서 의식구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8세기로 추정됩니다. 당대(唐代) 의정(義淨, 635~713)이 703년에 한역(漢譯)한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권3 「몽견금고참회품(夢見金鼓懺悔品)」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확인됩니다. “그때 묘당보살은 부처님 앞에서 묘한 법을 친히 듣고 나서 뛸 듯이 기뻐하며, 한마음으로 생각하면서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꿈속에서 큰 금북[金鼓]을 보았는데, 광명이 환하게 빛나기가 마치 해와 같았다. 이 광명 가운데서 시방세계의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께서 보배로 된 나무 아래 수정으로 만든 평상에 앉으시어 한량없는 백천 대중에게 둘러싸여, 그들을 위해 법문을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 어떤 바라문 한 사람이 북채로 금북을 쳐서 큰 소리를 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 소리 가운데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