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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탈핵 실크로드 방문기

무슬림 경전 코란, “종교 강요는 금물이다”

괴레메 계곡의 30개가 넘는 암굴교회
[생명탈핵 실크로드 방문기 32]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괴레메 시가지에서 멀지 않은 괴레메 계곡에는 30개가 넘는 암굴교회가 있다. 이들 암굴교회가 몰려 있는 곳을 야외박물관이라 이름 붙이고 울타리를 치고 입장료를 1인당 48리라(한국 돈 1만 원)를 받는다. 우리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수많은 관광객과 함께 야외박물관을 관람하였다. 바위 속에 작은 성당을 만들고 벽화까지 그려놓은 암굴교회는 로마의 카타꼼 지하 묘지교회와 함께 기독교 역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라고 한다. 로자 씨에게 물어보니 감리교 신학교 다닐 때 암굴교회에 관해서 교회사 교과서의 한 장으로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카파도키아 최초 기독교 수도자들의 흔적은 카이세리에서 성 바실리오(330~379)의 가르침을 따르던 공동체 사람들이 바위에 굴을 파서 살기 시작한 4세기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괴레메 계곡의 암굴교회는 대부분 12~13세기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야외박물관 안에 어둠의 교회(Dark Church)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을 관람하려면 추가로 입장료를 18리라 받는다.

 

나는 사실 벽화나 조각이나 미술 분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관심이 크지도 않아서 병산만 들어가라고 하고 나는 밖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조금 뒤에 병산이 올라오라고 손짓을 한다. 계단을 올라가 보니 병산이 터키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병산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관광안내인인데 탈핵 실크로드에 적극적으로 공감하면서 우리 두 사람의 입장료를 자기가 내주겠다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터키 사람의 친절은 어디를 가도 계속 이어진다.

 

야외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다시 괴레메 숙소로 걸어서 돌아왔다. 로자 씨는 딸과 함께 식성에 맞는 음식을 먹겠다고 식당을 찾아 나가고, 병산과 나는 저녁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다. 순례 여행에 동참한 이후 처음으로 고급 식당을 찾아가 소고기 스테이크를 먹었다.

 

조명이 근사하고 은은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화초를 아름답게 가꾼 고급 식당이었다. 내심으로는 술 한 잔을 곁들이면 좋겠으나, 병산은 순례를 시작한 이후 철저히 금주하기 때문에 나만 술을 먹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쨌든 오랜만에 누리는 음식 호사였다.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잠자기 전에 인터넷을 검색하여 이슬람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았다.

 

이슬람이 아라비아반도에서 나타나 대외 정복이 한창 진행되었던 7~8세기에 이슬람 군대는 기독교 또는 조로아스터교(배화교-拜火敎)를 믿는 지역들을 차례로 정복해나갔다. 인류 역사를 보면 정복자들은 정복한 영토에서 가혹한 세금을 강요하거나 자원을 착취했다. 근대 역사를 보면 서양의 기독교 국가들이 제국주의 정책을 통해 식민지인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에서 자행한 착취와 수탈은 ‘동인도회사’ ‘아편 전쟁’ ‘노예사냥’ 등을 설명하지 않아도 독자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코란 제2장 256절에는 “종교 강요는 금물이다.”라고 쓰여 있다. 서양 사람이 쓴 세계사를 배운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이슬람 정복자들은 피정복민들에게 타 종교를 인정하고 종교 공동체의 존속을 허용했다는 점이다. 이슬람이 1,400여 년 동안 지배해 온 지역에 아직도 소수의 다른 종교 집단이 자치를 누리며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 준다.

 

기독교에서 가장 오래된 공동체 중의 하나인 이집트의 콥트 기독교 공동체나 시리아의 정교회 공동체 그리고 이란의 유대교나 조로아스터교 등이 오늘날에도 자치권을 부여받아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고 있는 것이 좋은 예이다. 혁명 뒤에 철저한 이슬람법으로 헌법을 개정한 이란에서는 아직도 유대교, 아르메니아 정교회, 조로아스터교 사람들은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고 국회의원을 선출해 이란 국회에 보낼 수 있다.

 

이슬람 정복자들은 피정복민들에게 ‘지즈야’라고 불리는 인두세를 강요했다. 그것은 정복자로서의 권리다. 하지만 이교도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인두세를 감면받고 대신에 무슬림 누구에게나 의무로 규정된 종교세 ‘자카트’만 부과하였다. 물론 지즈야보다 자카트의 액수가 적었다. 지즈야를 내는 것이 크게 부담스러운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이 늘어나자 당연히 국가 재정 수입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슬람 정부는 개종자들을 엄격히 심사해 세금 감면을 노리는 개종을 억제하는 정책까지 등장했다.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어도 이슬람은 무함마드 사후 100년도 되지 않아 동으로는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로, 서로는 북아프리카를 거쳐 스페인의 이베리아반도까지 퍼져나가게 되었다. 무엇이 이러한 이슬람 확산의 원인일까? 학자들에 따르면 이슬람이 급속도로 전파된 것은 종교적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실하고 모험심이 많고 신앙심 깊은 무슬림 상인들의 공이 크다.

 

‘사막의 배’라고 불리는 낙타가 본격적으로 무역에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2세기 무렵이었다. 낙타는 말이나 노새보다 짐을 많이 실었고, 특히 사막을 건너는 데에 유리했다. 황량하고 드넓은 사막을 통과하는 일은 대상들에게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막에는 강이나 밀림이 없어서 이동 거리가 짧았고 맹수가 공격할 위험이 없었다. 낙타를 이용한 실크로드 교역은 오랫동안 이슬람 상인들이 주도하였다.

이슬람 상인들이 육로만 이용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홍해와 페르시아만을 능숙하게 항해하였고 인도양을 가로지르는 장거리 무역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이슬람 상인들은 다우선(아랍인이 만든 범선)을 타고 여름 계절풍을 이용하여 인도양을 건너 인도로 간 다음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까지 항해한 뒤에 겨울 계절풍을 이용하여 되돌아왔다.

 

계절풍 덕분에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도 이슬람이 전파되었다. 해상 교역을 통하여 서아시아의 양탄자와 유리, 인도의 면직물과 향신료, 동남아시아의 각종 향신료, 중국의 비단, 차, 도자기 등이 운반되었다. 또한, 이슬람 상인들은 동아프리카 연안의 도시 국가들을 장악하고 아프리카 내륙의 상아, 황금, 노예 등을 인도양의 다른 지역 상품들과 교역하였다.

 

이슬람 상인들이 무역업에서 눈부신 성과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가들은 이슬람 사회가 다른 문화권에 견주어 상업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평가한다. 여기에는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상인 출신이라는 점이 작용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까닭은 이슬람 통치자들의 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이슬람교도가 아닌 이교도도 정부에 인두세만 내면 경제 활동에 제한을 받지 않도록 보장했다.

 

이슬람의 황금 시기였던 아바스 왕조(750-1258)를 배경으로 하는 ‘신밧드의 모험’ 이야기는 바다 건너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이슬람인들의 관심과 동경을 잘 보여준다. 오랫동안 이슬람은 세계에서 문명이 가장 발달한 지역에서 번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