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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998. 조선시대 대비나 중전은 언문으로 교지를 내렸다.

998. 조선시대 대비나 중전은 언문으로 교지를 내렸다.

그동안 우리는 조선시대에 훈민정음이 일부 부녀자만 썼으며, 언문이란 말로 푸대접을 받았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슬옹 박사의 ‘조선시대 언문의 제도적 사용 연구“(한국문화사, 2005)란 책을 보면 당당하게 대접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명종실록 20년(1565년) 9월 15일의 “중궁이 언문 교지로~”, 광해군일기 원년(1608년) 2월 14일자의 “대왕대비의 언지에 계자를 찍어 빈청에 내리기를~”, 정조실록 10년 (1786년) 12월 1일의 “왕대비께서 빈청에 언문으로 하교하기를~” 등의 기록을 보면 대왕대비, 왕대비, 중전처럼 내명부의 어른들은 언문으로 교지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이 언문교지를 이해하고 따르기 위해 신하들도 언문을 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언문은 푸대접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한문과는 또 다른 공식 언어였으며, 많은 사람이 언문을 익히고 썼습니다. 쉽게 배우는 훈민정음은 이렇게 인정받을 수밖에 없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