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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탈핵 실크로드 방문기

1만 명의 천주교인, 잘못된 유권해석으로 순교

“제사는 우상 숭배다.”라는 교황청, 200년 뒤 제사 허용
[생명탈핵 실크로드 방문기 44]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오늘은 드디어 이스탄불에서 아시아나 비행기를 타고 인천으로 가는 날이다. 새벽에 아잔 소리에 잠이 깨었다. 하루에 5번 빠지지 않고 기도하면 누구나 독실한 무슬림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매일 새벽 기도를 빠지지 않고 다닌다면 그 사람은 독실한 기독교인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나라에는 전통적인 종교인 유교와 불교, 그리고 근대에 서양에서 전해진 천주교와 개신교, 그리고 순수한 토종 종교인 대종교, 천도교와 원불교 등 여러 가지 종교가 섞여 있다. 그렇지만 종교 분쟁이 끊이지 않는 중동 지역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또 여러 종교가 싸우지 않고 비교적 사이좋게 공존하는 나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관용과 공존이 거저 얻어진 것은 아니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에 천주교가 처음 전파된 것은 18세기 후반이다. 정조 8년인 1784년 이승훈은 베이징에서 서양 신부에게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고 돌아와 천주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 후 7년이 지난 1791년에 최초의 순교자(윤지충)가 생겼다. 그는 왜 사형에 처해졌을까? 부모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10계명 가운데는 “여호와 외에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다. 조선에서는 전통적으로 제삿날에 부모의 위패 앞에서 절을 하고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당시 천주교에서는 제사 때 위패에 절하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라고 유권해석을 하고 제사를 금지했다. 이러한 유권해석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제사를 거부하는 천주교도들을 부모를 모르는 금수와 같은 자들이라고 비난하며 잡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대략 1만 명의 천주교도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천주교가 동양에 전파된 역사를 살펴보면 처음부터 제사를 금지한 것은 아니다. 1498년에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한 이후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 선교를 시작하였다.

 

1582년에 마카오에 들어간 마태오 리치는 중국어를 공부하고 중국 문화 적응주의 방식으로 선교했다. 예수회는 조상 숭배와 공자 공경을 인정하고 제사를 허용했다. 중국의 전통적인 개념인 천(天) 또는 상제(上帝)를 하나님의 호칭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덕분에 청나라 황제 강희제는 1691년에 천주교가 사교(邪敎)가 아니며, 천주교를 관대하게 대하라는 칙서를 발표하면서 중국 선교는 활기를 띠었다.

 

중국의 제사가 논란이 된 것은 1613년 도미니크회 선교사들이 제사를 교리에 어긋나는 미신적인 우상 숭배라고 주장하면서부터이다. 1643년에 도미니크회 선교사 모랄레스가 예수회가 채택한 적응주의 선교 방식의 문제점을 교황청에 제기함으로써 치열한 논쟁이 진행되었다.

 

1715년 클레멘스 11세 교황은 “천주(天主) 외에 천이나 상제 같은 용어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쓸 수 없으며, 조상 숭배와 공자 공경 의식을 금지한다.”라는 칙서를 발표했다. 청나라 강희제는 교황이 황제의 권한을 침범한다고 분노하면서 중국에서 천주교 활동을 금지했다. 교황 베네딕트 14세는 1742년 조상 제사 금지를 명문화하고 모든 선교사가 이를 따르도록 지시하였다. 이로써 100년 동안 지속한 제사 논쟁은 제사 금지로 결론이 났다.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중국 천주교의 방침을 따랐다. 1791년에 전주 교구의 윤지충이 모친의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살랐다는 이유로 처형되면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후 천주교 신자들은 한불조약이 체결된 1886년까지 박해를 받았는데, 제사를 지내지 않는 불효불충한 무리라는 죄목으로 1만 명이 처형되었다. 천주교 신자들은 한불조약 이후 신앙의 자유는 얻었지만, 선교사들의 전통문화에 대한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1925년에 발간된 천주교요리(天主敎要理)에서는 제사를 거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제사에 참석하거나 제사 음식을 먹는 것, 주검에 절하는 행위 등을 이단으로 엄격하게 금지했다.

 

교황청이 제사에 대한 완고한 태도를 바꾼 것은 일본의 신사참배 문제 때문이었다. 1932년 일본의 가톨릭 대학인 죠치(上智)대학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는데, 이때 일본 천주교회는 신사참배를 허용하는 방침을 정했고, 교황청은 이를 승인했다. 이어서 1939년에 교황청은 조상 제사를 허용하는 훈령을 발표했다. 1742년부터 200년 동안 금지된 조상 제사가 다시 허용된 것이다.

 

나는 제사 논란의 역사적인 과정을 알아보다가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안타까웠다. 중국에 처음 천주교를 전파한 예수회가 끝까지 선교를 맡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청나라의 강희제가 천주교의 전파를 금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에서 1만 명이 목숨을 잃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제사는 우상 숭배다.”라는 교황청의 유권해석은 결코 절대적이 아니었고 200년이 지나서 뒤바뀌었다. 우리의 선조 1만 명이 잘못된 유권해석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필자가 이처럼 제사와 우상 숭배에 관해서 길게 쓴 것은 이 문제가 단지 천주교만의 문제가 아니고 이슬람이나 불교나 유태교나 그 밖의 모든 종교에 똑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성경이나 코란이나 불경이나, 경전에 나오는 구절을 절대적이라고 믿는 어리석음은 경계해야 한다. 한 사람의 신학자나 성직자의 경전 해석을 절대적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 가끔 우리나라에서도 문제를 일으키는 사이비 종파에서 보듯이 어느 한 사람의 경전 해석을 절대적이라고 믿고 따르다가 패가망신할 수도 있고, 역사에서 보듯이 목숨을 날릴 수도 있다.

 

아침 식사를 간단히 호텔에서 해결하고 나는 10시쯤 호텔을 나가면 된다. 호텔 직원은 40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다행히 그는 영어를 잘한다. 그래서 그와 잠시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그에게 “터키 사람이 친절한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그는 빙긋이 웃더니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변을 하였다.

 

“이슬람 경전인 코란에는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는 말이 나온다. 터키는 유목 민족이 세운 나라인데, 유목 민족은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전통이 있다. 터키 사람들은 가정 교육에서부터 다른 사람에게 친절히 하라고 가르친다. 터키 사람들은 학교에서도 친절을 중요한 덕목으로써 강조하여 가르친다. 터키 사람들이 특히 애국심이 강하다는 것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호텔 직원에게 부탁하여 콜택시를 불렀다. 택시를 타고 10분 정도 가니 공항 가는 버스가 기다리는 정류장이 나온다. 택시비는 10리라였다. 공항버스 요금은 18리라로서 싼 편이었다. 버스 안에서 교통카드를 기계에 대면 결제가 된다. 공항버스는 10시 30분에 출발하였고 40분이 지나 아타튀르크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 내려 들어가는데 청소를 하는 남자가 보인다. 나는 10리라 정도 잔액이 남아있는 이스탄불 교통카드를 그 남자에게 주었다. 그는 환한 미소로 사올(터키어로 고맙다)이라고 인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