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부인의 도리에 있어서 언서로 글을 올리는 것이 무슨 지장이 있겠는가.
더구나 대신(大臣)을 신원하는 일과 관계가 있으니 금부와 정원에서 어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일상적인 법규로 개괄하여 논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에 대해 논한 바는 지나치다고 하겠다.” 이는 광해군일기
2년(1610) 5월 16일자의 기록입니다. 여성이 억울함이 있어 언문으로
공식문건을 만들어 관청에 접수했는데 이를 물리쳤어야 한다는 사간원의
의견을 광해군이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며, 대죄하지 말라고 전교했습니다.
당시도 벼슬아치들은 공식문건이 한문으로 되어야 한다며 주장하지만 언문이
서서히 공식문서로도 인정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전의 어른들인 대비나 중전이
언문을 썼던 것과 함께 현대에 한글이 한문을 제치고 공식용어로 쓰일 수 있는
그 바탕이 마련되고 있었던 것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