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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수덕여관, 그곳에 살았던 세 사람

《예술가의 여관》, 임수진, 이야기나무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수덕여관!

예산 덕숭산 자락에 있는 이 여관의 이름은 어딘가 친근한 데가 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이름난 수덕사 대웅전, 그 대웅전을 품은 수덕사에서 운영하는 공간인 까닭이다. 우리나라 근대 예술가 세 명이 지치고 힘들 때 말없이 품을 내어준,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공간이기도 하다.

 

 

《예술가의 여관》 지은이 임수진은 우리나라 근대 예술가들에게 각별한 공간이었던 이 수덕여관을 미래의 예술가들에게 소개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내게 재능이 있기는 한 건지, 꿈을 이룰 수나 있을지 시시각각 불안한 마음이 들 때, 100년 전의 선배 예술가처럼 수덕여관에 머물며 용기를 얻어보라고 말이다. 작가의 목소리에 힘을 얻은 수덕여관이 그들을 한 명 한 명, 차례로 부른다.

 

나는 초가집이었습니다.

색색이 고운 덕숭산 자락이 내 터전입니다.

본래 비구니 스님들이 쓰시던 절간이었는데

수덕사를 찾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손님들의 쉼터가 되었습니다.

…(중략) 그래서일까요,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면

그들의 사연을 하나하나 잊지 않고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오늘 잊을 수 없는

3명의 손님에 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머릿말 ‘여관의 기억’ 중 (p.8-17)-

 

 

첫 번째 손님: 나혜석

 

나혜석은 수원 ‘나 부잣집’에서 태어나 신교육을 받고 자란, 남부러울 것 없는 여성이었다. 경성 진명여고를 수석 졸업한 사실이 사진과 함께 신문에 실리며 미모와 두뇌를 동시에 갖춘 재원으로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그녀는 일본 유학 중이던 둘째 오빠, 나경석의 권유로 도쿄미술학교 서양화부 유화과에 입학한다. 당시 도쿄에서 촉망받는 시인이었던 최승구와 사랑에 빠져 집안과의 절연도 불사했지만, 최승구가 병으로 이른 죽음을 맞이하며 나혜석은 한동안 방황한다.

 

우여곡절 끝에 변호사 김우영과 혼인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렸고, 한국 여성화가로는 처음 유화 개인전을 열어 성황을 이루는 등 화가로서의 성공도 거뒀다. 그러나 김우영과 함께 떠난 세계여행에서 저지른 최린과의 불륜이 모든 불행의 씨앗이 됐다.

 

이 일로 김우영과 이혼하고 사회적으로도 매장당한 나혜석은, 재기 의지를 불태웠으나 결국 일어서지 못했다. 남자의 축첩은 문제 삼지 않으면서도 여자의 행실에는 유난히 민감한 세태를 성토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더욱 외면당할 뿐이었다.

 

고립무원의 처지가 된 나혜석은 수덕여관을 찾아갔다. 거기엔 파란만장한 32년 동안의 삶을 접고 여승으로 수도하고 있는 일엽스님이 있었다. 말년에 병이 깊어지며 수덕여관을 나온 그녀는 결국 무연고자 병동에서 숨을 거뒀다.

 

 

두 번째 손님: 김일엽

 

김일엽은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도 근대식 교육을 받고 자란, 의식 있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이화학당을 다니던 1915년 무렵, 가족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며 20살 나이에 혼자가 되었다.

 

 

22살이 되던 해 연희전문학교에서 화학 교수로 재직 중이던 이노익 교수와 결혼해, 그의 후원으로 여성 잡지 《신여자》를 발간하는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펼친다. 그러나 물질적으로는 풍족하지만, 애정 없는 결혼생활을 견딜 수 없었던 그녀는 결국 이혼을 택하고, 그 뒤 몇 번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고,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한다.

 

결국 1933년 여름 무렵, 진정한 자신을 찾겠다는 발심으로 출가하여 수행에 정진한다. 1962년 펴낸 책 《청춘을 불사르고》는 많은 사람을 불교에 귀의하게 만들며 일대 파란을 일으켰고, 영화배우 김지미를 비롯한 유명인사들이 일엽을 좇아 가르침을 받았다.

 

일엽은 향년 76살에 수덕사 견성암 별실에서 열반에 들었다. 생전에는 사랑에 실패하고 입산한 비구니라는 세간의 편견으로 승려이자 사상가로서의 행적은 주목받지 못하였으나, 1988년 이후 재평가가 이루어지며 자유연애, 신정조론, 개인주의 사상 등 시대를 앞서간 여성운동을 펼친 선각자이자 종교운동가로 조명되고 있다.

 

 

세 번째 손님: 이응노

 

이응노는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머물며 근처에서 유화와 조각을 가르치던 시절, 나혜석에게 배우기 위해 찾아온 제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나혜석의 그림과 바람처럼 살아온 나날을 동경했고, 이는 훗날 이응노가 파리로 훌쩍 떠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이응노는 어릴 적 지독한 가난과 그림을 천대하는 집안 분위기 속에서도 꿈을 꺾지 않고, 19살에 청양 사는 누이에게 간다며 도망치듯 집을 나서 무작정 상경했다. 열다섯 번의 퇴짜 끝에 사군자와 산수화의 대가인 해강 김규진에게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문인화보다 서양 화풍을 선호하는 시대적 변화와 맞물려 그의 그림은 잘 팔리지 않았고, 한계를 느낀 그는 전주로 내려가 간판집 사장으로 변신한다. 사업이 잘되어 많은 돈을 벌자 다시 문인화의 본고장인 전주에서 효산 이광렬과 설송 최규상 등에게 사군자를 배운다. 그러나 전시회에서는 번번이 낙선만 거듭하다가 28살의 어느 날, 벼락같이 새로운 화풍을 창안하고 이를 기점으로 잇달아 입선하며 화가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이응노는 거기 만족할 수 없었다. 더 큰 배움이 필요했고, 결국 모든 사업을 정리해 32살 일본으로 건너가 여러 스승에게 수학한다. 그 와중에 일본에 폭격이 계속되는 등 전황이 심상치 않자 1945년 3월, 폭격에 휩싸인 도쿄를 뒤로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응노가 수덕여관을 찾은 것은 이 무렵이었다. 서양화의 대모,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기거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간 것이다. 이응노는 나혜석이 떠난 뒤 수덕여관을 인수해 수리했다. 현판도 직접 달았다. 지금 남아 있는 현판이 이응노의 작품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고암화숙을 설립해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홍익대학 미술학부에서 주임교수로 활동하던 그는 한국전쟁으로 그간 그려왔던 스케치를 비롯하여, 전 재산을 잃었다. 다들 포기할 만한 상황에서도 이번엔 돌파구로 유럽진출을 모색해, 마침내 파리 유명한 파케티 화랑의 전속화가가 되었다.

 

이후 동백림사건으로 억울한 고초를 겪다가 1983년 10월,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며 조국과 작별한다. 마음의 고향은 언제나 한국이었지만, 아들에게마저 체포 영장이 발부되고 백건우와 윤정희 납치사건에 연루되는 등 정부의 감시와 모략이 점점 심해지자 내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1989년 1월, 그는 결국 고국에서 열린 전시에 참가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수덕여관을 거쳐 간 세 명의 예술가들. 동시대 인물이었던 이 셋은 세상에서 버림받았을 때, 서로에게 힘과 용기가 되어주었다. 서로가 가진 예술적 재능, 그리고 시대를 앞서간 사상을 알아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각자의 삶에서는 잘못도 있고 부침도 있었지만, 예술에 대한 열정과 의지만큼은 그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세 사람이었다.

 

수덕여관은 오늘도 그 자리에 서 있다. 세 사람이 엮어낸 이야기를 말없이 품고서. 수더분한 초가집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귓가에 맴돈다. 봄이 오면 한 번, 찾아가 보고 싶은 곳이다. 나혜석 작가와 일엽 스님, 이응노 화백이 툇마루에 앉아 반겨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