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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남사당패의 우두머리, 꼭두쇠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601]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제26회 부평 풍물축제>에 초대되어 남사당의 고유 6종목 완판공연을 펼친 <인천 남사당놀이보존회> 이야기와 이들의 공연에 운집해 있던 관객들이 대단한 반응을 보였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번 주에는 ‘남사당(男寺黨, 男寺堂)놀이’의 역사와 특징적 활동 등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 보기로 한다.

 

앞에서도 잠깐 말한 바와 같이 남사당이라는 말에서 남(男)이란 남자, 곧 사내라는 의미로 해석되어 남성들만의 조직이란 점을 알 수 있다. 이 조직이 딱히 언제부터 존재해 왔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남사당패, 사당패, 광대패, 솟대쟁이패, 초라니패, 풍각쟁이패 등과 같은 다양한 놀이패들이 있었다는 점, 이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며 다양한 소리, 악기, 춤, 연희의 재주를 펼치며 살아왔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러한 유랑 예인집단 가운데는 재승(才僧)계통, 곧 불교와 관련된 연희집단도 있었는데, 《고려사(高麗史)》와 같은 문헌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불교에 속한 무리이면서도 장사치들과 물건을 매매하고, 잡인(雜人)들과 술을 마시거나, 속인(俗人)의 복장을 하고 다니면서 절을 짓는다는 명분 아래 악기를 연주하거나 공연을 일삼는 재승들도 있었다.

 

그러나 유교 국가인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사원에서 쫓겨난 재승들에게는 어떠한 혜택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불교의 색채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남사당의 생성시기를 고려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인지, 조선이라면 어느 시대부터 독신 남성들의 유랑예인집단, 남사당의 활동이 시작되었을까?

 

다만, 이 문제를 다룬 심우성은 그의 저서인 《남사당패연구》에서 유랑하는 민중놀이 집단이 있었음을 보이는 문헌으로 《해동역사》를 들면서 남사당놀이 종목의 하나인 꼭두각시놀음이 신라에 있었다는 점을 상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그때그때의 단편적인 소개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그 연원을 가늠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여간 분명치는 않아도 조선시대를 거쳐 1900년대 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해 온 것을 상기해 보면 그 역사는 적어도 조선 중기 이후, 수공업이 발달하고 농업생산량이 증대되면서 시장(市場)을 통해 상품들이 유통되고, 교환되던 시기는 분명해 보인다. 이렇듯 여러 고을에 큰 시장이 형성되고,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면, 자연스럽게 유랑(流浪)예인 집단들도 모여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지내면서 남사당패가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경계한 일제는 남사당패를 해체하기 시작하였는데, 일제강점기에 흩어진 남사당을 복원하기 위해 마지막 남사당패 꼭두쇠였던 남운용(南雲龍1907∼1978) 등은 광복 이후, 여섯 마당을 되찾기 위해 1954년 ‘안성 농악대’를 결성하는 등, 활동의 재개를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 남사당 꼭두쇠 지운하 명인의 상쇠 가락에 맞추어 남사당놀이 놀이 6개 종목 가운데 하나인 풍물놀이에서 치배들이 무동놀이를 펼치고 있다.

 

남사당패는 조직의 우두머리, 꼭두쇠를 정점에 놓고, 40∼50명의 연희자로 구성되는 독신 남성들의 연희집단이다. 그러므로 꼭두쇠는 엄격하게 명령과 규율로 남사당패를 통제하지 않으면 연희의 성과를 내기가 어렵다. 이들의 연희 종목이 누구나 쉽게 연행할 수 있는 평범하고 단순한 기예가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고난도의 종목들을 일사불란하게 연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6종목이란 ‘풍물놀이’, ‘버나돌리기’, ‘땅재주 넘기’, ‘줄타기’, ‘탈놀음’, ‘인형극’ 등이다.

 

이상의 여섯 종목의 연행 시간도 상당한 편이다. 때에 따라 관중들의 반응이 좋을 때는 공연시간이 훨씬 늘어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다음 장소로 옮겨 갈 때 종목별 준비물이나 소도구의 분량도 상당한 편이어서 이동할 경우, 소속 단원들의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연행하는 장소를 물색하는 일이 쉽지 않다. 6종목을 모두 펼칠 넓은 공간이 필요한 조건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공간이 쉽게 제공되겠는가!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 시장(市場)이나 동네의 넓은 공터를 찾고 고르는 과정도 예삿일이 아니다.

 

 

1964년, 남사당놀이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남운용 명인을 중심으로 하는 <인형극회 남사당>이 조직되면서 사양길에 들어섰던 남사당놀이의 전통은 점차 되살아나기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인형극의 역할이나 전승은 문화재 선정과정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국가는 1964년 12월, 중요무형문화재 1호 종묘제례악, 제2호 양주별산대놀이, 그리고 제3호로 인형극, 곧 꼭두각시놀음 등을 동시에 국가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는데, 처음에는 남사당놀이가 아니라 <인형극>만 지정된 것이다. 다른 5종목은 아직 본격적인 활동이 재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분야 연행자들이나 관계자들로서는 다소 아쉽게 생각했지만 우선, 인형극만이라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게 된 것은 다행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후, 인형극 외에 나머지 5종목을 되찾기 위해 열심히 전승활동을 재개해 왔고, 그 계승 작업에 박차를 가해 드디어 6종목 모두를 원래대로 복원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남운용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고 한다.

 

국가 문화재위원회는 1988년, 남사당패 연행 6종목 전체를 중요무형문화재로 확대 지정하면서 그 이름도 원래의 이름인 <남사당놀이>라고 정정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2009년 9월, 남사당놀이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어 세계인들의 관심을 끄는 쾌거를 이루기도 하였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