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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훈민정음 역사

공학박사의 한글 이야기 9

[우리문화신문=신부용 전 KAIST 교수]  저번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훈민정음은 반포 58년 뒤 연산군 때 (1504년) 지하로 쫓겨 들어가 20 여 년을 지내고서 중종조의 어문학자 최세진의 훈몽자회에서 한자 학습의 보조역할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훈몽자회는 어린이들의 한자 학습을 위해 만든 교재였는데 한자의 음과 훈을 언문으로 써 주었던 것이지요.

 

최세진은 언문을 모르는 사람은 배워서 쓰라고 범례를 만들어 훈민정음을 간략하게 소개했는데 여기서 기역, 니은 등 자모의 이름이 처음으로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어디에서도 훈민정음을 제대로 가르치는 곳이 없었으므로 이 범례야말로 당시는 물론 이후에도 한 동안 언문 공부의 유일한 교재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언문은 편지나 일기를 쓴다든지 혹은 언문 소설을 읽는다든지 하여 민간사회로 깊숙이 번져나갔으며 궁궐에서도 대비, 중전을 비롯한 내명부에서는 흔히 언문으로 교지를 내렸습니다. 이렇게 언문이 널리 전파됨에 따라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1592년 선조는 언문교지를 써서 길거리에 내붙였습니다.

 

이후에도 숙종의 계비였으며, 경종의 대비였던 인원왕후는 1726년 언문교지를 내려 영조임금을 즉위시켰고 아버지 김주신과 어머니 가림부부인 조씨를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은 《선군유사》와 《선비유사》를 언문으로 써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렇듯 조선시대 내내 언문은 주로 여자와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는 긴요하게 쓰였지만 소위 사대부라 불리는 문무 양반들은 주자학에 빠져 훈민정음을 외면하였으며 혹 아쉬우면 부인 몰래 머슴들에게 배웠다고 합니다.

 

이렇게 훈민정음이 박대받던 사실은 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 Homer Bezaleel Hulbert)의 회고록에서 나타납니다. 그는 1886년 영어교사로 초청되어 입국하였는데 훈민정음을 접하고 그 훌륭함에 놀랐고 동시에 이렇게 훌륭한 문자가 너무나 억울하게 푸대접을 받고 있어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충격은 바로 훈민정음 사랑으로 바뀌고 다시 조선에 대한 연민과 애착으로 발전해 결국 일생을 조선의 독립을 위해 바치다시피 하게 된 것입니다.

 

그의 조선에 대한 애국심과 공헌이 얼마나 컸으면 안중근 의사는 일본 경찰에게 조사를 받던 1909년 12월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였습니다. 그가 이룩한 위대한 공적이 훈민정음 사랑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곧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한글의 덕을 입고 사는 것입니다.

 

헐버트는 훈민정음을 나흘만에 완전히 터득하고 3년 뒤, 1889년에는 한글학자 경지에 올라 한국 첫 순한글 지리 교과서인 《사민필지(士民必知)》를 펴내 자신이 교사로 있던 육영공원의 교재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책은 미국 고등학교의 지리책을 기반으로 당시 조선의 경제, 사회, 문화를 다른 나라와 견줘 설명함으로서 조선인들이 꼭 알아야 할 내용을 소개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한글은 현존하는 문자 가운데 가장 우수한 문자"라면서 한글을 보급하려고 당시 23살이었던 주시경과 함께 한글을 연구하여 띄어쓰기와 마침표 등 기초 문법을 도입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여러 경로를 통해 미국에 알렸습니다.

 

 

조선이 마침내 일제에 넘어가 헐버트는 추방당하였다가 1945년 광복을 축하하기 위해 재입국하려 했으나 아내의 병치레로 좌절되었습니다. 아내가 죽은 뒤 1949년 광복절 기념식에 다시 초대되자 그는 86살의 노구를 이끌고 40년만에 내한하여 7일만인 8월 5일에 세상을 떳습니다.

 

아마도 "한국땅에 묻히고 싶다"라는 평소의 바람을 이루고자 죽음을 앞두고 무리하게 내한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주시경 선생에게 언어학 지식을 전수하여 한글을 현대에 맞게 발전시키도록 한 공로는 매일 한글을 쓰고 있는 우리로서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개화기 한글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이로 지석영 선생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가난한 양반집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친구에게 한문과 의학을 배웠으며 자진하여 중국과 일본 사절단을 따라다니며 신문명을 배웠습니다. 그는 어깨 넘어 종두법을 배워 1880년 2월 전국에 전파시킴으로서 어린이 죽음과 치명적 후유증을 남기는 무서운 질병인 천연두를 몰아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두 역시 개화운동으로 몰려 배척을 받았다니 당시의 무지몽매함에 놀랄 수 밖에 없습니다.

 

지석영은 일본과 중국처럼 우리도 개명하여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렸지만 오히려 개화파로 몰려 5년 종안이나 유배생할을 하게 됩니다. 1881년에는 유배지에서 《신학신설》이라는 위생과 예방을 위한 기본적인 의학서적을 순한글로 펴냈습니다. 앞에서 본 헐버트의 입국이 1886년 이었으니 그보다 먼저였던 것입니다.

 

 

그는 의료업에만 전념한다는 조건으로 유배에서 풀려 서울 교동에서 무료 우두시술소를 열어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1883년 문과에 급제한 그는 벼슬길에 올라 1894년 김홍집의 개혁내각이 들어서면서 형조참의로 등용되어 적극적으로 개혁운동을 시작하여 우여곡절 끝에 1899년 칙령으로 의학교가 설립되고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어 의료계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이렇게 의료발전과 세상을 깨어나게 하는 개명(開明)운동을 수행하면서 지석영은 국문(한글)을 보급시켜야 한다는 신념이 생겨 1896년 <대한독립협회> 창간호에 논설로서 국문론을 게재하면서 국문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1905년에는 흐려져 가는 훈민정음을 다시 살리고 한자로 되어있는 문서들을 번역해 국민을 가르쳐야 한다고 <신정국문(新訂國文)> 상소를 올렸습니다.

 

고종은 이를 심히 옳다 하며 1907년 1월 국문연구소를 만들어 지석영을 임원으로 임명하였으며 5월에는 지석영이 스스로 국문연구회를 창립하고 스스로 총무가 되어, 10명의 연구원과 함께 자신이 주창한 <신정국문>을 연구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한 명이었던 주시경은 지석영, 유병필과 함께 편찬원으로도 활약하여 주된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지석영은 최세진의 《훈몽자회》를 수정 보완하여 3,104자의 《훈몽자략(訓蒙子略)》을 펴내기도 하고 1906년에는 16,298자의 한자를 해석하는 《자전석요(字典釋要)》까지 간행하는 등 한글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지석영은 의사가 본업이었습니다. 1914년 유유당(幼幼堂)이라는 소아진료소를 차려 80년 삶을 마감할 때까지 아이들의 건강을 돌봤습니다. 그가 한글 발전과 보급에 바친 노력은 국민의 보건생활과 개명(開明)을 위해서는 국문의 발전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신념에 의한 것이 아니었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