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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과 나라에 모든 삶을 바친 주시경

공학박사의 한글 이야기 10

[우리문화신문=신부용 전 KAIST 교수]  개화기에 들어오면서 선각자들은 구국운동으로 우리글을 살려 발전시키려 하였습니다. 유길준은 1895년 《서유견문》에서 역사상 최초로 국한문을 혼용하여 언문이 일치하는 문장을 써서 세상을 놀라게 했으며 이듬해 서재필은 처음 띄어쓰기까지 하는 순 한글로 된 <독닙신문>을 발간했습니다.

 

띄어쓰기는 전번 이야기의 헐버트가 자신이 저술한 《사민필지》를 읽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는 띄어쓰기가 필요하다고 여겨 주시경과 상의해 띄어쓰기와 마침표 등을 도입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지석영, 이익로, 최남선 등 많은 선각자가 한글발전을 위해 헌신하였지만, 그 가운데 대표로 주시경 선생을 앞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시경은 한마디 말로 450년 동안이나 묻히다시피 하여있던 훈민정음을 다시 발굴해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새 생명을 불어넣어 준 사람입니다.

 

주시경은 1876년 서당 훈장의 아들로 태어나 11살에 사업가 백부의 양자로 가서 글방에 들어가 한학을 공부하였습니다. 16살 때 한문을 국문으로 해석하면서 한국어 연구가 필요하다고 느껴 18살에 배재학당에 입학해 만국지지 특별과를 거쳐 보통과에 입학해 영어문범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1898년이었으므로 전번 이야기의 헐버트의 훈민정음연구의 조수로 일할 때였던 것입니다. 그 뒤 주시경은 1907년 지석영의 국문연구회 연구원으로 일 한 경험도 있어 헐버트의 영어 실력과 언문에 관한 관심, 그리고 지석영의 《신정국문》을 전수받았습니다.

 

한힌샘 주시경은 원조 한글전용 주의자였습니다. 말본(문법), 이름씨(명사), 느낌씨(감탄사) 등 학문 용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한편 자식들 이름까지 모두 우리말로 고쳤습니다.  맏딸 송산은 솔메, 맏아들 삼산은 세메, 둘째 아들 백산은 흰메, 둘째 딸 춘산은 봄메, 셋째 아들 왕산은 임메,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이름도 흰샘으로 고쳤습니다. 성씨도 고쳐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끝에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말로 크다는 뜻인 ’한‘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하고 성까지도 ‘주’에서 ‘한’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므로 일부 자료에 한힌샘을 호라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호가 아닌 이름인 것입니다.

 

 

나라의 운이 가물가물하던 1898년 당시 23살의 한흰샘은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개화운동에 앞장서다가 조정의 탄압을 피해 시골에 숨어들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는 우선 국문을 제대로 발전시켜 보급하여야 한다고 깨닫고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또한 한글을 보급해 놓으면 혹 나라가 망해도 그 얼은 살아있어 결국 독립하게 되리라 생각하고 즉시 《국어문법(1898)》을 체계화하고 가르쳐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찾아가 가르쳐줬습니다. 이화학당, 명신학교, 흥화학교, 외국인 연구소 등 자그마치 스무 군데가 넘는 장안의 거의 모든 학교를 돌면서 한글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는 한글 개혁가였습니다. 가로쓰기 운동의 창시자로 국어강습회에서 이를 강의하였고 수료증은 우리말로 가로써서 만들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문자로써의 경쟁력을 위해 풀어쓰기도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한글을 분석하여 홀소리(모음) 6자 (ㅏㆍㅓㆍㅗㆍㅜㆍㅡㆍㅣ)와 닿소리(자음) 10자(ㄱㆍㅇㆍㄷㆍㄴㆍㅂㆍㅁㆍㅈㆍㅅㆍㅎㆍㄹ) 등 모두 16자가 기본을 이룬다고 보고 나머지 글자들은 이들의 합성으로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홀소리 6자는 훈민정음 해례에 이미 설명된 바 대로이지만 홀소리 10개를 뽑아 기본이라고 정리한 것은 처음 있는 획기적인 일입니다. 이 주장은 빛을 보지 못했지만 10이라는 숫자가 예사 숫자가 아닌 점을 고려하면 지금이라도 살려내어야 할 엄청난 주장인 것입니다. 더구나 글쓴이는 기본 모음도 사실상ㅣ,ㅏ,ㅓ, ㅡ, ㅗ, ㅜ, ㅐ,ㅔ,ㅚ,ㆍ(하늘 ‘아’) 등 10개의 단모음이라고 주장합니다. 다른 모음은 이들을 합성하여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본적인 닿소리과 홀소리가 모두 10개씩이라는 주장이 성립하여 한글 음절을 모두 10개의 모음자와 10개의 자음자로 표현할 수 있게 됩니다. 이로써 모든 언어의 발음을 표기할 수 있으므로 모든 언어의 발음을 0부터 9까지 10개의 수치로 바꿔 놓을 수 있다는 엄청난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는 세계 언어의 표기법과 ICT기술(컴퓨터를 기반으로 정보 및 정보 시스템을 제공하고 이용하는 기술)에 혁명을 가져올 수 있는 주장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따로 논하기로 하겠습니다.

 

1910년 8월 29일, 마침내 나라가 망하자 한흰샘은 몇 날 며칠을 땅을 치고 슬피 울었으며 1914년 만주로 망명을 결심했으나 떠나지도 못하고 3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습니다. 1898년 배재학당에서 헐버트와 함께 국어문법을 체계화하고 전파하기 시작한 때부터 1914년까지 16년을 그는 모든 것을 한글과 조국에 바친 것입니다.

 

그의 가르침은 외솔 최현배 선생이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조선어 연구회(1921)와 그 후신 조선어학회(1931)를 이끌며 1933년 발표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산파역을 했습니다. 그 또한 몸을 던져 한글운동을 지속하다가 41년에 조선어학회 사건(* 글상자 참조-맨 아래)으로 투옥되어 옥중에서 광복을 맞게 되었습니다. 광복 뒤 미군정에서 그를 문교부 편수국장으로 위촉하여 우리말로 된 교과서를 쓰도록 했으며 정부수립 뒤 다시 편수국장을 맡아 한글정책을 주도하였습니다.

 

 

이때 그는 훈민정음의 순경음(ㅸㆄ)과 반치음(ㅿ)까지 사용하여 ‘들온말 적는법’을 만들었는데 51년 한글 맞춤법을 간단하게 고치라는 이승만 대통령과의 의견차이로 문교부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1898년 한흰샘이 시작한 한글 발전시대는 51년 외솔선생의 퇴임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들온말 적는법’은 ‘외래어 표기법’이 되어 영어뿐 아니라 중국어의 발음을 제대로 적지 못하게 되어 지금의 문제를 끌어가고 있습니다.

 

지금의 한글은 우리가 일본인 다음으로 영어를 못하고 중국어를 로마자로 써서 배우는 부끄러운 신세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어학회 사건

 

1941년 조선총독부는 우리말과 글의 연구를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인 <조선어학회>가 《조선어사전》을 일부 인쇄하기 시작하자 <조선어학회> 학자들을 대거 잡아들였다. 이것이 바로 “조선어학회사건”이다. 이때 홍원경찰서에서는 사전 편찬에 직접 가담했거나 재정적 보조 등 협력한 사람 33명에게 모두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를 뒤집어씌웠다. “고유 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다.”라는 것이 내란죄를 뒤집어씌운 까닭이었다. 이후 기소유예 등으로 풀려난 사람을 빼고 함흥형무소 미결감에 수감되었던 16명 가운데 이윤재와 한징은 옥중에서 죽고, 두 사람이 석방되었으며, 나머지 12명이 재판에 넘어갔다. 재판 결과 이극로 선생 징역 6년, 최현배 선생 징역 4년 등 한 사람을 빼고는 모두 유죄가 선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