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15 (토)

  • 흐림동두천 20.6℃
  • 흐림강릉 22.9℃
  • 서울 21.9℃
  • 구름많음대전 22.1℃
  • 맑음대구 22.5℃
  • 박무울산 21.6℃
  • 맑음광주 22.3℃
  • 구름조금부산 22.8℃
  • 맑음고창 20.4℃
  • 구름많음제주 22.1℃
  • 흐림강화 19.9℃
  • 구름많음보은 19.8℃
  • 구름많음금산 20.7℃
  • 구름조금강진군 20.6℃
  • 맑음경주시 20.4℃
  • 맑음거제 21.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망국 조선에서 한글을 구해내다

공학박사의 한글 이야기 11

[우리문화신문=신부용 전 KAIST 교수]  

 

더욱 절실해진 한글보급

 

전번 이야기에서 지석영, 헐버트, 주시경이 지하에 묻혀있던 훈민정음을 살려내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당시는 매우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1894년 1월 동학 난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할 능력이 없던 조정은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6월에는 청군이, 7월에는 일본군이 우리나라로 진군하여 결국 우리 국토를 놓고 두 나라가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때 명성황후는 러시아 세력을 끌어드리려 하다가 일본 무관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동학 농민의 세력은 일본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진압되었습니다.

 

1895년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이겨 조선은 500년 동안 섬겨오던 청나라로부터 해방됨으로써 일본의 한국 지배가 유력해졌습니다. 이에 고종은 1896년 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여 일본에 대항하려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1898년 당시 23살이었던 한힌샘 주시경은 망국의 위험을 실감하고 서둘러 국문법을 정리하여 닥치는 대로 보급을 서둘렀던 것입니다.

 

한글맞춤법의 출현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까지 물리친 일본은 을사늑약을 맺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게 됩니다. 한힌샘은 1906년에는 자신이 정리한 《대한 국어문법》의 목각본을 내고 학문적 축적을 거쳐 1910년 대표적 저술인 《국어문법》을 펴냈습니다. 이 해에 결국 조선이 일본에 병합되어 총독부의 직영체제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총독부는 1912년 한힌샘의 국어문법을 기본으로 하여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을 만들어 초등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학교에서 한글을 배우게 됨으로써 나라는 망해 없어져도 한글은 살려내야 한다는 한힌샘의 소원이 이루어진 셈입니다. 그의 죽음(1914) 뒤 그의 제자들이 1921년 “조선어의 정확한 법리연구”를 목적으로 조선어 연구회를 만들고 그 후신인 조선어학회가 3년 동안의 검토를 거쳐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을 공표하였습니다.

 

이렇게 일제의 통치가 한창일 때 초등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쳐주고 한글학회가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만들어 공표하도록 허용했다는 사실은 뜻밖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말을 못 쓰게 하고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바꾸었다고 알고 있는데 어찌 된 일일까요?


 

 

 

한글에 대한 관용은 일본의 흉계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중국, 일본 러시아가 모두 탐내는 땅이었고 조선은 외부 세력을 막아 낼 힘이 없는 나라였으므로 위에서 본 것처럼 이들은 서로 조선을 차지하려고 각축을 벌였습니다. 여기서 이긴 일본은 1905년 통감부를 설치하여 조선을 사실상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총독으로 온 이등박문은 일본의 세력이 한창 팽창하던 1885년 44살의 나이로 초대 총리대신이 되어 60살까지 4번을 지낸 일본 최고의 정치인으로 일본인들에겐 영웅일지 모르지만, 우리 겨레에겐 철천지원수였습니다.

 

그는 조선과 만주를 개발하여 복속시킴으로서 일본을 세계 최강국으로 발전시키려는 야망을 품었지만, 초기에는 관용정책으로 조선을 달래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등박문의 정책도 안중근 의사에 의해 살해당하자 병합론자들의 주장이 우세해져 한일합병이 이루어졌습니다. 순종 황제는 폐위되고 조선총독부 직영체제로 들어간 것입니다. 당시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처단하지 못하고 그의 관용정책이 성공했으면 우리는 점차 뼛속까지 변해 일본인이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한글 정책도 이와 궤를 같이했습니다. 곧 1911년 일본은 언어학자 호시나 코이치를 유럽에 유학 보내 프로이센과 독일이 1772년 점령한 포젠주(현 폴란드 포즈나니현)를 동화시키기 위해 어떤 언어정책을 썼는지 연구하도록 하였습니다. 호시나는 장기적으로는 조선어를 말살시켜야겠지만 초기에는 식민지의 문화를 존중해 주어야 백성의 반항이 없어지고 감동하여 심복해 올 것이라고 보고했으며 총독부도 그의 제안대로 유화정책을 썼던 것입니다.

 

이러한 유화정책은 1938년 3월에 끝을 내고 일본어 상용(常用)정책에 들어가 일본 글자와 일본어만을 사용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조선어는 정규 교과목에서 사라지고 1940년 우리글 신문을 폐간하였으며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도 강행하였습니다.

 

1942년 출판을 기다리던 《조선어 대사전》도 원고가 압수당하고 나아가서 사전편찬에 참여하던 교사 정태진(丁泰鎭)에게서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 단체로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자백을 받아내 전번 이야기에서 소개한 '조선어학회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전편찬에 참여했던 33명이 모두 투옥되고 마지막까지 갇혀있던 최현배와 1945년 8월 18일 사형집행이 예정되었던 이극로는 15일 해방을 맞아 석방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겨레는 마침내 독립을 얻어 대한민국을 세우고 세계 10위권의 강국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해낸 안중근, 윤봉길 등 독립투사들과 그리고 마지막 남은 기회를 잡아 한글을 살려낸 한힌샘, 헐버트, 지석영 등의 선현과 최현배, 이극로 등 한글학자들의 덕이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아마도 하늘에서 세종대왕과 조상들이 도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조상들의 피땀으로 지켜 낸 위대한 한글을 마땅히 세계에 펼쳐 세종대왕의 큰 뜻을 이룩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