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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내 만세운동 주역 처음 밝힌 ‘김구응 열사 평전’

유관순 열사에 가려진 ‘아우내의 산증인 김구응 열사’의 삶 파헤쳐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나는 오래전 4·1아우내 만세운동의 현장이었던 아우내(병천, 竝川)에 수년 동안 머무르면서 유관순 열사의 기념관과 생가, 열사를 기념하는 공원을 나의 산책 코스로 정하고 거의 날마다 그곳을 거닐었다. 그러면서 나는 유관순 열사의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는 《김구응 열사 평전》(틈새의 시간 출간)을 쓴 전해주 성공회 신부의 말이다. 전해주 신부는 충남 아우내(병천) 성공회교회에서 사제로 지내면서 뜻밖에 ‘4·1아우내 만세운동’의 주역이 유관순 열사(이화학당 유학생, 당시 17살)가 아닌 당시 지역 유지이자 아우내에 첫 근대식 학교인 청신의숙(靑新義塾)을 세우고 더 나아가 성공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김구응 열사(당시 32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글줄깨나 쓰는 신부'로 알려진 전해주 신부는 아우내 성공회교회에 부임한 뒤, 4년 뒤에 맞이할 성공회교회 100돌을 기념하기 위한 ‘100주년 교회사’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교회사(敎會史) 집필을 위해 교회에 보관되어 오던 1920년~30년대 자료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만난 인물이 김구응 열사였다. 그 자료는 강애단 신부의 회고록이었는데 이 기록에서 4·1아우내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이 유관순 열사가 아니라 진명학교 교사였던 김구응 열사였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전해주 신부는 “그동안 나는 유관순 열사가 4·1아우내만세운동의 주역이라는 사실에 대해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배웠고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접한 사실은 큰 충격이었다.” 라고 고백한다. 이때부터 전해주 신부는 팔을 걷어붙이고 김구응 열사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후손들을 만나는 등 역사에 파묻혀있던 김구응 열사의 ‘삶을 조명’하는 데 온 힘을 쏟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것이 <성공회 병천교회의 3·1 아우내 만세운동에 대한 기여> (전해주. 2006. 성공회대학 석사논문) 라는 논문이다. 그는 이 논문에서 천안 아우내만세운동 주역이 김구응 열사였음을 소상히 밝히고 있으며 유관순 열사가 한국의 잔 다르크이자 독립의 여전사로 주목받게 된 경위를 밝혔다.

 

이번에 펴낸 《김구응 열사 평전》은 전해주 신부 자신이 발로 뛰어 찾아낸 자료를 바탕으로 쓴 논문을 뼈대로 삼고 이후 추가된 자료들을 모아 아우내만세운동의 주역이 김구응 열사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힌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작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은 모두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장에서는 <김구응, 그는 누구인가?>를 다뤘는데 김구응 열사의 뿌리가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金時敏, 1554~1592) 장군의 12대손으로 1908년 아우내에 정착한 이래 청신의숙(靑新義塾)이라는 사설 교육기관을 세워 한학을 비롯한 근대식 교육을  하고 이어 성공회에서 세운 진명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4·1아우내만세운동을 치밀하게 조직하고 선두에 서서 진두지휘하게 된 과정을 밝혔다.

 

제2장에서는 <성공회와 진명학교>를 중심으로 영국의 성공회가 당시로서는 시골인 아우내에 들어와 교회보다는 학교를 먼저 세우고 조선인의 교육에 힘썼던 배경과 4·1아우내만세운동에 이바지한 점 등을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제3장 <그날의 함성>에서는 우리가 그동안 잘못 알고 있던 ‘4·1아우내만세운동’의 형성 과정과 김구응 열사의 활약상을 각종 자료를 토대로 밝혔다. 4월 1일, 아우내장터에서 열린 만세운동의 선두에 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군중을 이끌었던 김구응 열사는 진압하던 일본군의 총탄에 의해 현장에서 순국의 길을 걷는다. 더욱 참혹한 사실은 김구응 열사(당시32살)의 어머니인 최정철 열사(당시 66살) 역시 일본군의 칼에 찔려 아들과 함께 그 자리에서 순국의 길을 걷게 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날한시에 순국한 모자(母子)가 겪은 통한(痛恨)의 역사를 아는 사람은 적다.

 

마지막 제4장에서는 <아우내만세운동,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다. 1919년 3월 1일(아우내에서는 4월 1일),일제가 조선을 강탈한 뒤 겪어야 했던 조선인들 분노의 함성이 전국에서 화산처럼 끓어 올랐다. 당시의 이러한 만세운동 소식은 상해 임시정부에 곧바로 타전되었다.

 

김병조 선생이 쓴 《한국독립운동사략(韓國獨立運動史略)》(1920.6)과 박은식 선생이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1920.12) 등에서는 당시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상세히 다루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만세운동을 이끈 주역을 김구응 열사와 그의 어머니 최정철 열사로 밝히고 있다.

 

 

“4월 1일 천안군 인사들이 병천시장에서 시위운동을 벌이자 왜병이 시위행렬의 기수(旗手)를 찌르려 하자 기수는 맨손으로 총검에 대항하여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왜병은 그의 배를 찔러 죽였다. 주모자 김구응이 왜경에 항론하니 논리적으로 궁하여 답변을 못 하고 말문이 막히자 왜경이 총검으로 스스로 찌를 듯하더니 돌연 김구응을 향해 총을 쏘아 죽이고 머리를 부수고 온몸을 난자했다. 그의 어머니가 시체를 안고 기절하니 왜경은 노모(최정철 열사)마저 찔러 죽였다.”

                          -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박은식(1920.12.30.) 지음, 남만성 번역, (2019.3.1.)

 

‘4·1아우내만세운동’에 대한 위와 같은 명백한 역사학자들의 기록이 있음에도 김구응 열사와 그의 어머니 최정철 열사는 왜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있었던 것일까?

 

《김구응 열사 평전》을 쓴 전해주 신부는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4·1아우내만세운동에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김구응 열사는 현장에서 바로 사살되었기 때문에 재판 등 그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심지어는 그의 가족들마저도 일본의 후환이 두려워 쉬쉬하며 그 고장을 떠나 흩어져 살아온 까닭에 제대로 된 기록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그의 사진 한 장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성공하지 못한 거사는 결국 묻히기 마련이고 기록이 없으면 역사는 없는 것이다. 반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왜경에 잡혀 조사만 받고 나오더라도 그 기록이 있으면 애국지사라는 칭호를 받고 독립유공자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애국지사는 결국 검거 기록이든, 재판 기록이든 이름이 적혀 있기만 하면 저절로 증명되는 것이다. 하지만 큰 만세운동을 목숨 걸고 준비하고 앞장서다 결국 왜경의 총탄에 쓰러진 사람들은 기록을 남길 수도 없었고, 가족들도 소거되었으니 당연히 잊히기 마련이다. ”

 

1919년 4월 1일, 일본군의 잔혹한 아우내만세운동 진압 후 석 달이 지난 뒤의 정황을 알 수 있는 기록인 《종고성공회월보(宗古聖公會月報)》(1919.7.)에 따르면 만세운동 뒤 오래지 않아 열린 부활절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구 바나바 신부가 아우내 성공회교회에 왔지만, 신자들이 거의 모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 까닭은 일경의 감시와 통제가 심했다는 증거며, 또한 진명학교 선생이던 김구응 열사가 일본군의 총탄에 숨지고 많은 신자가 경찰에 끌려간 것을 목격한 신자들이 교회 가는 것을 꺼렸다는 증언들을 보아 당시 분위기가 얼마나 삼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4·1아우내만세운동의 주역인 김구응 열사와 어머니 최정철 열사는 천안 지역에서조차 잊혀 버린 인물이 되고 말았다. 전해주 신부는 말한다.

 

“유관순이라는 인물에 대한 영웅화 작업과 이를 상품화한 아우내(병천) 지역의 정서로 인해 김구응 열사의 후손들은 독립유공자 가족으로서 받는 국가적 혜택은 차치하고 유관순 열사에 견주면 거의 무시에 가까운 무관심과 처우에서 비롯한 서운함과 억울함을 안고 가슴앓이를 하며 살아야만 했다.”고 말이다.

 

《김구응 열사 평전》 끝부분에는는 김구응 열사의 후손인 김운식 선생이 쓴 ‘나의 아버지’란 글이 실려있다. 증조할머니(최정철 열사)와 그의 아들 (김구응 할아버지)이 만세운동 현장에서 순국함으로써 평화롭던 김운식 선생의 일가(一家)는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나버렸고 삶은 깊은 구렁텅이로 곤두박질쳐버렸음을 알 수 있다. 눈물 없이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처절한 글이다.

 

후손은 말한다. “만세운동은 그때 그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려는 작은 노력을 모아 그날의 함성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 

 

《김구응 열사 평전》을 첫 장부터 끝까지 일독한 기자의 느낌도 후손의 생각과 같다. 4·1아우내만세운동의 진실을 알고 싶다면, 아니 국난의 시기에 불굴의 의지로 목숨을 바쳤던 김구응 · 최정철 모자(母子)의 외침을 듣고 싶다면 이 책의 일독(一讀)을 권한다. 다음은 《김구응 열사 평전》에 축사를 보낸 분들의 한마디다.

 

*김구응 열사는 아우내의 역사다. -김구응열사기념사업회 김종수 회장

*역사적 사실에 숨어 있는 객관적 사실을 파악하여 과거의 오류를 밝히고 오늘의 진실을 찾아내야 한다. -천안역사문화연구회 이용길 회장

*나라의 광복을 위해 수많은 선열이 피를 흘렸다. 이들의 피로 되찾은 조국에서 우리들이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 김구응 열사 손자 김운식

*아이들의 미래를 희생으로 밝힌 진정한 ‘선생’이자 ‘독립운동가’ -충청남도교육감 김지철

*우리의 현재는 독립운동의 미래였다. -천안독립기념관장 한시준

*작은 불씨 하나가 큰불을 일으키다 -대한성공회 대전교구장 유낙준 모세 주교

*이 글을 쓰고 정리하는 내내 4·1만세운동을 준비하며 독립을 염원했던 김구응 열사의 절박한 소망과 그 과정상의 긴박한 분위기, 그리고 거사 당일 만세운동의 함성이 나의 침침한 서재 안을 가득 메웠다. 큰 영광이었다. - 지은이 전해주 신부

 

기자는 여성독립운동가의 삶을 추적하여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사실은 김구응 열사의 어머니인 최정철 열사를 먼저 알았다. 이후 그의 아드님인 김구응 열사를 알게 되었고 이들 모자(母子)가 아우내만세운동의 주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간 '아우내 만세운동의 주역이 유관순 열사'라는 사실만 강조되고 있던 차에 《김구응 열사 평전》의 출간을 계기로 '천안 아우내만세운동'의 진실이 새롭게 조명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