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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외래어표기법’은 없다

공학박사의 한글 이야기 13

[우리문화신문=신부용 전 KAIST 교수]  전번 이야기에서 ‘외래어표기법’을 없애고 대신에 언어별로 외국어 표기법을 만들자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외래어라는 것은 외국에서 들어와 우리말이 된 어휘를 말합니다. 어디서 들어왔건 우리말이 된 이상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하여 사전에 올려 쓰면 그만입니다. 사투리도 많이 쓰게 되면 표준어가 되어 사전에 올라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 ‘대박(daebak)’ 등 26개의 한국 낱말이 ‘옥스퍼드 사전’에 올랐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외래어표기법’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불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외래어 표기법의 원조는 일본어

 

그런데 왜 ‘외래어표기법’이 생겼을까요?

그것은 일본의 통치를 받던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처음 등장하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우리보다 개방이 40년 정도 빨라 서양 문물이 물밀듯이 들어오던 때였지요. 서양의 지명이나 사람의 이름은 물론 일반 낱말들도 많이 들어와 이를 일본 글자로 표기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한자로 번역하여 새로운 어휘를 만들어 내는 한편 그들의 고유 문자인 가나로 외국어 어휘의 발음을 따라 표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자로는 서양 어휘의 발음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약속이 필요했습니다. 예를 들어 fan을 일본 ‘가나’로 비슷하게나마 표기하려면 f를 ‘フ(후)’로 표기하여 ‘ファン(후앙)’이라고 썼던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을 모아 ‘외래어표기법’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를 따라 우리도 ‘외래어표기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f 와 p를 ‘ㅍ’으로 표기한다는 등의 규칙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외래어표기법’ 없이 훈민정음 옛 글자로 쓸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사실상 우리 한글은 별도의 ‘외래어표기법’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규칙을 안 만들었어도 p는 당연히 소리를 따라 ‘ㅍ’으로 표기했을 것입니다. f가 문제인데 찌아찌아 사람들처럼 순경음 ㅍ(ㆄ)으로 표기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글상자 참조) 당시에는 ㆄ 뿐 아니라 ㅸ도 사용하고 있었으며 훈민정음해례를 보면 ‘가벼운ㄹ( )’도 있었습니다. 특히 은 우리 말에는 없는 발음이지만 중국어 발음표기에 필요하다는 설명까지 있습니다.

 

해례본을 펴낸 지 얼마 뒤에 나온 언해본에는 중국어의 치두음 표기를 위한 ᄼ, ᄽ, ᅎ, ᅏ, ᅔ등과 정치음 표기를 위한 ᄾ, ᄿ, ᅐ, ᅑ, ᅕ등 글자들이 소개됩니다. 이렇게 훈민정음은 표기할 수 있는 발음의 영역이 넓을 뿐 아니라 새로운 소리가 나타나면 얼마든지 그 소리에 맞게 글자를 변형하거나 합자(合字)하여 새로운 글자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외래어 표기를 위해서라면 훈민정음의 글자를 사용하도록 하면 해결될 문제였습니다.

    

찌아찌아족의 한글 표기법

 

 1. 글자 사용: ᄫᅮ(순경음ㅂ 사용)

 2. 사용: 띵까

 3. 발음 표현: Li 를 ‘을리’ 로 표현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는 《훈민정음해례본》이 발견되기 전이었고 우리 학자들이 마음대로 연구할 처지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외래어도 많지 않아 정확히 표기해야 할 필요성도 그리 크지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광복 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세계 6대 무역국이 되어 한류가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는 이때까지도 이런 ‘외래어표기법’에 매달려 있다는 데 있습니다.

 

‘외래어표기법’ 개정을 위한 시민운동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외래어표기법’을 개정하자는 운동을 꾸준히 벌였습니다. 이들의 주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영어의 frv 와 plb 의 발음을 구별하여 표기하자는 것이었습니다. p와 b는 ㅍ과 ㅂ으로 표기하면 문제가 없으므로 f와 v의 표기문제가 주로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순경음을 도입하자는 의견과 새로운 글자를 만들자고 하는 등 의견이 많았습니다. r과ㅣ은 ㄹ과 ㄹㄹ (쌍ㄹ)을 쓰면 됩니다. 그러나 정책당국은 아직 어떤 개정안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유는 아래와 같이 단순합니다.

 

국어 정책당국이 ‘외래어표기법’ 개정을 반대하는 까닭

 

1. ‘한국인이 인지하기에 가장 적합한 표기 형태를 취하는 것이 의사소통에도 바람직한 방법이 될 터이다. 따라서 새로운 표기법 도입은 바람직하지 않다.’ 결국 생소한 글자는 알기 힘들어 안 된다.

 

2.‘ 「f」 발음을 위해 새로운 기호로 대체한다는 것은 외래어 표기를 위해 제 나라 자음을 일그러뜨려야 하는 엄청난 부담일 뿐 아니라 이렇게 새 표기를 도입하기 시작하면 v 발음 등 다른 발음과 다른 언어도 고려해야 하는데 이는 국민에게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이 역시 별 절실하지도 않은 문제로 국민에게 혼란을 줄 것이므로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가 별로 없으니 괜히 고치지 말자는 뜻입니다. 이는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소치이며 어렵지 않게 개정안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레 겁을 먹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국어정책당국에 다시 한번 호소합니다

 

정책당국자들은 외래어와 외국어를 혼동하기 때문에 이렇게 잘봇된 주장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외래어표기법‘이 불필요한 존재라는 것과 외국어 표기법은 각 외국어 전문 분야에서 만들도록 해야 할 일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영어 발음표기의 문제로 우리 국민이 당하고 있는 불이익과 중국어 학습을 위해 로마자 병음을 써야 하는 부끄러운 사실을 뼈아프게 생각하여야 합니다.

 

우리 정책당국자들은 찌아찌아에 한글을 수출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러면서 찌아찌아에서는 순경음 ㅍ과 새로운 발음표기, 그리고 된소리를 사용하는 등 ’외래어표기법‘을 어기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찌아찌아를 원한다면 ’외래어표기법‘을 포기해야 함을 방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 으뜸 문자라면서 겨우 찌아찌아 한 곳에서만 채택하고 있다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수치입니다. 더 많은 나라에서 한글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가 먼저 좋은 한글을 만들어 제공하여야 할 것입니다.

 

2030 만국박람회 유치가 유력하게 점쳐지고 있습니다. 유치에 성공하면 이는 우리 문화가 세계에 노출되는 획기적인 기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최고문화재는 단연 한글입니다. 이런 기회에 한글 서예나 자랑하고 있을 건가요? 정책당국은 심각하게 고민해 주시기 바랍니다.

 

 

찌아찌아족이 가르쳐주는 외래어(외국어)표기법

 

위에서 보인 그림은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의 도로명 안내표지입니다.

 

자기네 표기방식으로는 ‘Jalan Tinkaha Liwu’인데 찌아찌아족 ‘한글표기법’으로는 ‘잘란 띵까하 을리ᄫᅮ’로 표기했습니다. ‘Tin’을 ‘띵’이라고 표기한 것은 원래 그들의 발음이 ‘띵’인데 로마자로는 Tin으로밖에 표기하지 못해 한글 표기로 원래의 발음을 살린 것입니다. ‘Li’를 ‘을리’ 라고 한 것은 쌍ㄹ(ㄹㄹ) 발음을 내기 위한 편법입니다. 지난 9번째 이야기에서 소개했던 지석영 선생은 ri 는 ‘으리’로 li 는 ‘을리’로 표기하여 r과 l, 두 발음을 구별하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쌍ㄹ’을 쓰면 될 문제였습니다. ‘ᄫᅮ’는 ‘wu’를 ‘순경음ㅂ(ㅸ)’으로 표기한 것입니다.

 

찌아찌아족이 맨 처음 한글 표기를 환영한 것도 자신들의 부족 이름이 ‘찌아찌아’인데 로마자로는 jiajia로 표기하여 원래의 소리와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우리 ‘외래어표기법’은 경음을 못 쓰게 합니다. 우리가 이를 고집했다면 그들은 한글 표기를 거부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