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학자 남영 조식은 퇴계 이황에 견줄만한 대학자였습니다. 그는 벼슬을
거부하고 평생 처사로 지냈지만 명종임금과 대비 문정왕후 비판 상소를 올리고 대학자
퇴계를 비판할 정도로 꿋꿋한 인물이었습니다. 실천하는 선비정신을 가르쳐 제자 중에는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 많았습니다. 그는 지리산 기슭으로 들어가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講學)에 힘썼지요.
조식은 “요즘 학자들이 인성과 천명을 말하나 실행이 부족한데 이것은 마치 시장을 지날
때 진기한 보물을 보고 비싼 값만 따지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또 그는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예의를 버리고 천지자연의 이치를 논하는 것은 한갓 입에 발린
이치이며, 자신을 반성하여 실천에 힘쓰지 않고 견문과 지식이 많은 것은 바로 입과
귀로만 하는 학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시대에 그의 가르침은 두고두고 새겨야 할
덕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