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고교동기 조윤신으로부터 《레이의 사부곡(思夫曲)》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책 표지에는 빨간색 큰 글씨로 《레이의 사부곡(思夫曲)》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 앞의 작은 글씨의 제목까지 다 하면 <정치음모에 걸린 옥중의 용을 그리는 레이의 사부곡(思夫曲)>입니다. ‘사부곡’이란 지아비를 생각하며 부르는 노래라는 것이겠지요. 그러면 대충, 정치음모에 걸려 옥에 갇힌 ‘용’이라는 지아비를 그리워하며 쓴 책임을 짐작하게 됩니다.
자유당 때 조봉암 진보당 사건 아시지요? 《레이의 사부곡(思夫曲)》은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윤신의 장인 전세룡 선생이 옥중에 있을 때 장모 정일례 여사가 장인에게 쓴 편지를 주로 담은 책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레이’는 정일례의 ‘례’를 약간 변형시켜 부르는 애칭이겠고, ‘용’은 ‘전세룡’의 ‘룡’일 것 같네요.
조봉암 진보당 사건은 잘 아시다시피 이승만 대통령이 정적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시킨 사건인데, 인혁당 사건과 함께 우리나라 대표적인 사법살인 사건입니다. 대한민국 사법부 치욕스러운 역사지요. 저는 법조인으로서 조봉암 사법살인을 마음 아파하는 사람인데, 뜻밖에도 윤신이 장인이 그 사건에 연루되었었군요.
지금부터 《레이의 사부곡(思夫曲)》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윤신이는 퇴직한 뒤 변호사 개업할 때까지 장모님이 고이 간직하고 있던 편지들을 정리하여 책으로 내느라고 바빴습니다. 그래서 저한테도 그 일 마무리하고 나서 정식으로 변호사 업무를 시작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드디어 책이 나오니 저한테도 책을 선물해주었구요.
머리말에서 전세룡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소개로 정일례 여사를 알게 되어 창경원, 우이동 단풍구경을 같이 갔다가 피차 나이도 30 전후이고 보는 눈도 밝아 정들기 시작하였다. 이러던 중 58년 1월 13일 진보당 정치음모 조작사건이 청천벽력과 같이 일어났다. 이리하여 용은 고문에 죽다가 살아 감옥에 갇히는 운명이 되었다. 친인척도 동지도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고독한 몸이 되었다. 원래 건강한 몸이었으나 금이 많이 난 독과 같으니 고문 테러의 여독으로 병이 나면 위험한 상태였다.
물이 스며드는 배를 타고 파도 높은 바다에 표류하는 운명! 그러나 하늘은 버리지 않았고 인간 정일례는 구제해 주었다. 예로부터 위인은 하늘이 돕고 귀인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 뒤 정일례 여사는 암흑을 비추는 한 줄기 빛처럼 돈으로 건강을, 책으로 학식을 얻게 하고, 사랑으로 고독을, 옷으로 동상을 예방하여서 한 달이면 여러 차례 면회하여 옥살이를 무사히 지나게 하고, 출옥하니 갈 곳 없는 고독한 몸을 맞아 주었다. 이만하면 가히 열녀며 천사로다.”
이대 교육학과와 동 대학원을 나온 정일례 여사는 당시 문교부 교육시설과에 근무하면서 경기대 전임강사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여자가 대학강사까지 하고 있었다면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서 얼마든지 좋은 혼처를 구해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집안에서도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 재판받는 남자를 포기하고 다른 데 시집가라고 종용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일례 여사는 그런 압박과 유혹을 뿌리치고 옥중의 연인을 위해 계속하여 면회 가고 편지를 쓰는 등 온몸과 마음을 바쳤습니다. 가히 전세룡 선생이 아내를 열녀며 천사라고 부를 만하겠습니다.
한편 전세룡 선생은 그런 고문의 후유증 속에서도 붓글씨에 매진하여 서예전에서 금상도 타고 초대작가도 되고 나라 밖 전시회도 가질 만큼 활동하셨으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선생은 고향인 함경북도 명천군 남면 내포리에서 반동분자로 찍히자, 미친 사람으로 가장하고 유랑 걸식하다가, 1·4후퇴 때 남한으로 탈출합니다. 그리고 1952년 죽산 조봉암 선생을 만나 진보당 창당에 뛰어듭니다. 그런데 잘 알려진 대로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선거로 겨우 조봉암 후보를 누른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 대통령 선거가 걱정되니까, 1958년 1월 13일 진보당 관계자들을 국가보안법 위반과 간첩죄로 몰아 구속시킵니다.
그리고 1심에서는 용기 있는 유병진 판사에 의해 무죄가 선고되었지만(일부분은 유죄로 조봉암, 양이섭은 징역 5년, 전세룡은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결국 2심에서 뒤집힙니다. 그리하여 선생은 징역 2년을 선고받았고, 죽산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형을 선고받아 1959년 7월 31일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선생은 구속되어 고문받을 때, 북한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대한민국 전복을 획책한 죄를 인정하라며 지독한 고문을 당했다고 합니다. 반동분자로 찍혀 북한에서 탈출한 선생이 김일성 지령을 받았다니, 분노가 치밀어오르면서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책에는 1999년 8월 18일 자 동아일보 기사도 실려있는데, 기사에는 선생을 고문했던 한승격이 양심 고백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한승격은 당시 진보당 사건 조작에 협조한 대가로 290만 원을 받아 그걸로 집도 사고 혼인도 했다고 실토합니다. 손자들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죽기 전에 양심선언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나요. 뒤늦은 양심 고백이었지만, 그래도 백범 암살범 권두희가 끝까지 진실을 밝히지 않고 죽은 것보다는 낫습니다.
아! 참! 《레이의 사부곡》 읽은 소감을 얘기하면서, 아직 순정파 처녀의 절절한 사부곡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편지에는 옥중의 연인을 그리워하는 한 처녀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가 계속 나옵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용, 내 정신만 황홀케 해놓고 지금 안 계시니 꿈같기도 하고 거짓말 같기도 하고... 이 방안에 커다란 한 자리가 비어요. 돌아오실 그날을 어떻게 기다리면 좋아요. 밤이 깊었으니 용의 평안한 잠을 비는 마음으로 이 밤을 용과 같이 보낸다 생각하고 우리의 그 이불을 펴겠습니다.” (1958. 11. 14.)
“나의 용이여! 오늘 하루 얼마나 외로우셨어요. 용을 생각하여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중간 줄임) 이제 겨우 11시 15분인데요. 용의 사진 지금 앞에 놓고 있어요. 와이셔츠만 입고 걸어가는 사진이 제일 맘에 드는데 용은 확실히 젊고 호남이에요. 늠름한 모습이 참 맘에 들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질 것만 같아 야단났어요. 그렇다고 바람피우지 마세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해주니 안심입니다. (중간 줄임) 이제 명상 그만하시고 주무셔요. 안녕히 주무세요. 꿈에 또 봅시다. 꼭 안아주세요. 놓으면 안 돼요. 깰 때까지... (1958. 11. 15.)
“변호사가 내일은 가실 것이고 대법원에 접수됐다는 얘기는 오늘 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공부 잘하라고 그러셨지요. 비교적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조금도 걱정마세요. 안녕히! 뜨거운 키스를 보냅니다.” (1958. 11. 29.)
어떻습니까? 연인을 그리워하는 처녀의 절절한 심정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뜨거운 키스를 보낸다니! 저는 1950년대의 연인들은 아직도 점잖은 연애를 할 것이라는 편견을 가졌는데, 그때도 연인에게 뜨거운 키스를 보내는군요. 그런가 하면 1959. 11. 19.자 편지에는 시도 쓰셨습니다.
님 그린 상사몽에 실솔(蟋蟀, 귀뚜라미)의 넋이 되어
바람 타고 날아가서 임의 곁에 앉았다가
날 부르는 용의 심정을 만져줄까 하노라.
쥐가 되어 기어갈까 새가 되어 날아갈까
외곬으로 가는 넋을 막을 자 없겠거늘
풀잎 같은 몸뚱이는 거칠 것이 많도다.
님의 곁에 가고 싶은 절절한 마음이 표현된 시네요.
편지는 1958년 5월 7일부터 7월 6일까지 이어지다가, 다시 1958년 11월 13일부터 1959년 2월 26일까지 이어집니다. 1심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선고받고 풀려났다가, 다시 수감되면서 편지가 이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레이는 다른 간부들은 17명이나 무죄가 신고되었는데, 왜 나의 용에게만 집행유예가 내려졌냐며 원망합니다. 다른 간부들과는 달리 용에게는 다른 혐의도 추가되어 있어, 그에 대해서는 집행유예가 나온 듯합니다.
석방되었다가 다시 수감되었으니, 그 실망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11월 14일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용, 내 정신만 황홀케 해놓고 지금 안 계시니 꿈 같기도 하고 거짓말 같기도 하고...” 겨우 님과 다시 같이 있게 되었다가 다시 님이 갇히게 되었으니, 처음에는 무척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감옥살이는 원래 힘든 법인데, 그 당시 감옥에서 겨울을 난다는 것은 상상 이상의 고통입니다. 그래서 레이는 용을 생각하여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을 자처한다며, 요도 깔지 않고 주무십니다.
그리고 레이는 용이 다시 나오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고 2심 판결을 기다렸는데, 그만 그런 희망도 헛되어 용은 1959년 2월 27일 징역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책의 마지막 부분은 옥중에서 용이 레이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수감자의 편지는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생은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용이 쓴 옥중편지는 두 달에 한 번 쓰는 시간과 글자 수의 제한, 엄동(嚴冬)의 추위에 손이 곱아 쓰기가 몹시 어려운 상황이었다.” 지금에 견주면 당시의 교도행정은 원시시대였군요. 편지에는 당시 교도소의 겨울나기가 얼마나 엄혹하였는지 보여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지난 1월 3일 후 돌연한 혹한은 추운 지방 태생인 저의 몸도 상하게 하여 겨우겨우 나날을 견디어 오다가 21일부터 풀리어 하혈증도 점점 좋아지고 있습니다. 영하 20여도. 마시다 떨어진 물고치는 떨어지기 전에 얼어 마루에 빙옥(氷玉)이 다르르 굴렀고, 두 가지 독(감방 안의 물독과 변기)은 동태처럼 얼었으며, 찬 기운은 가시가 있어 살을 에고 뼈를 깎는 듯 옥한(獄寒)의 모질음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으음~ 얼마나 살을 에는 추위였으면 마시던 물고치가 떨어지기 전에 얼어, 마루에 빙옥이 다르르 구르다니... 그러니 손이 곱아 편지 쓰기가 어려웠다는 것이 전혀 빈말이 아닙니다. 그런 추위의 교도소 겨울나기라니 참으로 비정한 교도행정입니다.
그런 어려움을 이겨내고 선생이 출소한 뒤 두 분은 백년가약을 맺었습니다. 그렇기에 두 분 사이에서 난 따님과 윤신이 결혼할 수 있었고, 그래서 지금 제가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행운도 있는 것이고...
윤신의 발간사 마지막에 “감히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충분히 그럴만한 값어치가 있는 책이었습니다. 또 그 덕분에 저는 미시적으로는 두 분의 사랑 편지에 감동받았고, 거시적으로는 사법살인의 진보당 사건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는 시간도 되었지요. 책에는 조봉암 선생이 남기신 말씀도 있었습니다. “이승만은 소수가, 나는 다수가 잘사는 정치를 하려고 한 것이 죄라고 죽이니, 이런 일이 역사에 다시는 없기를 바란다.” 그렇습니다. 이런 일이 결코 역사에 다시는 없어야 할 것입니다. 책을 덮으면서 조봉암 선생과 전세룡 선생께 고개 숙여 인사드립니다. 선각자시여! 그곳에서 대한민국이 평화통일 되는 그날까지 우리를 이끌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