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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토박이말의 속뜻 - '슬기’와 ‘설미’

[우리말은 서럽다 41]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우리 토박이말에는 이치를 밝히고 올바름을 가리는 일에 쓸 낱말이 모자라 그 자리를 거의 한자말로 메워 쓴다. 이런 형편은 우리말이 본디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머리를 써서 이치를 밝히고 올바름을 가리는 일을 맡았던 사람들이 우리말을 팽개치고 한문으로만 그런 일을 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있으면 말은 거기 맞추어 생겨나는 법인데, 그들은 우리말에 도무지 마음을 주지 않았다. 조선 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이천 년 동안 그런 분들은 줄곧 한문으로만 이치를 밝히고 올바름을 가리려 했기에 우리말은 그런 쪽에 움도 틔울 수가 없었다.

 

안타까운 노릇은 이처럼 애달픈 일을 아직도 우리가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치를 밝히고 올바름을 가리려는 학자들이 여전히 우리말로 그런 일을 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말이라야 우리 삶의 이치를 밝히고 우리 삶의 올바름을 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다.

 

‘슬기’와 ‘설미’는 그런 역사의 가시밭을 뚫고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이치를 밝히며 올바름을 가리는 몫을 해 주는 우리 토박이말이다. ‘슬기’는 임진왜란 뒤로 가끔 글말에 적힌 덕분에 무서운 한자말의 발길에 짓밟히면서도 살아남아 오늘 우리네 품까지 안겨 왔다. 아직도 ‘슬기’보다는 한자말 ‘지혜’를 즐겨 쓰는 사람이 많지만, 국어사전들이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달으며 사물을 처리하는 방도를 옳게 잘 생각해 내는 재간이나 능력”이라는 뜻풀이와 함께 올림말로 실려 있다. 이제는 뜻있는 사람들이 찾아 쓰기만 하면 갈수록 널리 쓰일 것이다.

 

 

‘설미’는 15세기 끝 무렵에 엮은 《악학궤범》에 한 차례 글말로 적힌 바가 있으나, 여태 국어사전에는 오르지 못한 낱말이다. 다만 ‘눈’의 매김을 받으며 쓰이는 ‘눈썰미’로만 국어사전에 올라가 있을 뿐이다. 그나마 그것이 ‘눈’과 ‘설미’가 붙은 낱말인 줄을 모르니까 둘을 가려서 속살까지는 풀이하지 못하고, “한두 번 보고 곧 그대로 해내는 재주”라는 껍데기 풀이만 달아 놓았다.

 

하지만 ‘설미’는 ‘이런저런 사정을 두루 살펴서 올바르고 그릇된 바를 제대로 가늠하여 올바름을 북돋우는 마음의 힘’이라는 뜻을 지닌 빼어난 우리 토박이말이다. 《악학궤범》에는 나쁜 귀것(귀신)을 쫓는 서낭 처용의 모습을 추켜세우는 대목에, “설(魄) 모도와 유덕(有德)퍛신 가턢매”라는 노랫말이 있다. 처용의 가슴은 ‘설미를 모아가지고 있어서 넉넉하신 가슴’이라는 말이다.

 

‘슬기’와 ‘설미’는 둘 다 마음에서 솟아나는 힘이라 비슷하지만, 솟는 샘의 자리가 얼마쯤 달라 구실도 그만큼 서로 다르다. ‘설미’는 몸과 더불어 마음의 가장자리인 느낌을 비롯하여 생각과 뜻을 아우른 자리에서 솟아나는 힘이다. 몸으로 바깥세상을 받아들여 빚어지는 느낌과 생각과 뜻을 두루 아우른 힘으로 올바르고 그릇된 바를 가늠하여, 그릇됨을 누르고 올바름을 북돋우는 힘이 설미다.

 

그러나 ‘슬기’는 오직 마음의 알맹이인 얼에서 솟아나는 힘이다. 몸이나 몸에서 비롯한 느낌과 생각과 뜻 같은 데서 솟아나는 설미와는 달리, 하늘에서 들어온 얼에서 솟는 힘이 슬기다. 이스라엘 겨레에서 자란 《구약성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모든 슬기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며 언제나 하느님과 함께 있다.”(집회서 1, 1) 보다시피 이것은 슬기가 얼에서 솟는 힘이라는 것을 잘라 말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