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데 세종이 뽑았음은 물론, 당대 최고의 음악가인 박연과 유생들이 반대가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이를 무릎 쓰고, 스스로 작곡을 강행하여 마침내 10년 뒤인 1435년 우리 향악으로 된 “보태평(保太平)” 11곡과 “정대업(定大業)” 15곡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합니다. 물론 이 음악은 곧바로 종묘제례에 쓰지 못하고 궁중 연회 때에만 연주했으며, 세조 때에 와서야 겨우 종묘제례에 쓰게 되었습니다. 결국, 우리 음악으로 된 진정한 종묘제례는 세종과 세조의 합작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참고 : “찔레꽃과 된장”, 이동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