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뒤주를 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뒤주는 예전 조선 사람의 집이면
어디에든 있었습니다.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서 비참한 삶을 마쳤지만 원래 뒤주는
쌀 ·콩 ·팥 따위 곡식을 담아 두는 살림살이의 하나이지요. 재료는 회화나무가
가장 좋으며, 두꺼운 통판으로 듬직하게 궤짝처럼 짜고 네 기둥에는 짧은 발이
달렸습니다. 뚜껑은 위로 제쳐서 열 수 있어서 뚜껑이 곧 문이기도 하며, 장석은
무쇠나 놋으로 해 달았습니다.
쌀뒤주는 보통 쌀 1∼2가마들이의 크기지만, 잡곡을 담던 뒤주는 3∼4말을
담을 수 있는 크기로 쌀뒤주보다 작지요. 전북 김제시 월촌면 장화리에는 조선
후기에 회화나무로 만든 약 70가마들이 대형 쌀뒤주가 있는데 이는 옛 한국
갑부들의 생활상을 알려 주는 귀중한 유물입니다. 뒤주는 그 속에 쌀이 차
있던 비어 있던 우리를 든든하게 해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