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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1914. 을사늑약 현장 덕수궁 중명전 복원되었다


1905년 11월 17일 오후 을사늑약이 강행된 덕수궁 앞과 회의장 안은 완전무장한 일본군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으며, 기병 800명, 포병 5,000명, 보병 2만 명이 서울 시내 전역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하지요. ≪한말외교비화(1930)≫에 보면 “슬피 부르짖는” 참정대신 한규설이 별실로 끌려나가는 순간 이토 히로부미는 다른 대신들을 보며 “너무 어리광을 부리면 죽여 버리라.”라고 크지 않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한규설·민영기·이하영은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았지만 11월 18일 새벽 1시쯤 이완용을 필두로 이지용·이근택·권중현·박제순의 을사오적은 매국노의 길을 걷게 됩니다. 

1942년 해외독립운동 지도자들 앞에서 황제의 특사 헐버트는 고종황제가 늑약에 동의도 비준도 하지 않았다고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역사에 기록될 가장 중요한 일을 증언한다. 황제는 일본에 항복한 적이 결코 없다. 긍종(肯從)하여 신성한 국체를 더럽힌 적도 결코 없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미국의 협조를 구하고, 만국평화회의에 호소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조선인 모두에 고한다. 황제가 보이신 불멸의 충의를 영원히 간직하라.” 이처럼 당시 고종 황제는 나라를 되찾으려고 온 힘을 다하다 독살됐다고 합니다.  

이 을사늑약의 현장 덕수궁 중명전은 양식(洋式) 2층 벽돌집 덕수궁 별채로 1901년 황실도서관으로 지어졌습니다. 그 뒤 1904년 덕수궁이 불타자 고종의 집무실인 편전이자 외국사절 알현실로 사용되었지만 일제에 의해 훼손되면서 외국인 클럽으로 사용되기도 했지요. 또 중명전은 을사늑약과 헤이그 특사 파견 등 구한말 역사 현장이었던 곳으로 지난 8월 29일 원형 복원돼 일반에 개방되었습니다.

문화재청은 중명전 내부를 역사현장체험공간인 상설전시관과 교육공간으로 조성해 한일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지난 29일 문을 연 것입니다. 이곳 1층 전시공간은 ‘중명전의 탄생’ ‘을사늑약을 증언하는 중명전’ ‘주권회복을 위한 대한제국의 투쟁’ ‘헤이그 특사의 도전과 좌절’로 이뤄졌습니다. 특히 을사늑약 체결 현장 상상도, 을사늑약에 반대했던 한규설을 감금한 것으로 추정되는 공간 등이 눈길을 끕니다. 2층은 고종 집무공간으로서의 의미가 두드러지도록 고종 어진, 어새, 관련 문건 등을 전시했지요. 국치 100년을 맞은 올해 우리는 이 비운의 현장 중명전과 1910년 8월 22일 일본의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 사이에 ‘강제병합조약’을 맺은 통감관저 터(남산 교통방송 옆)를 꼭 돌아봐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