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현악기들은 현을 손가락으로 뜯거나 채 따위로 켜서 연주하는 발현악기(撥絃樂器)에 가야금과 거문고, 활로 현을 마찰시켜 소리를 내는 찰현악기(擦絃樂器)에 해금과 아쟁이 있다. 이 중 1500년 전의 가야금이 현재까지 전승되어 오면서 많은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가야국의 유명한 악사 우륵과 그의 음악을 높이 인정했던 진흥왕의 만남이 결정적이라 말하고 싶다.
가야국이 망하자 가야금 한 틀을 품에 안고 신라로 투항한 악사 우륵(于勒) 선생을 신라에서는 국원성, 지금의 충주지방에 살도록 특별히 배려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륵은 단순한 악기연주자가 아니라, 가야국에서는 하늘과 땅에 제사 지내는 일을 비롯하여 대소사를 주도하고 결정하던 영향력 있는 유명 인사였기에 신라에서는 그를 딴 지방으로 옮겨 살게 해 특별히 보호 관찰했던 것이다.
고향땅을 등지고 충주에 정착하게 된 우륵 선생이 해야 할 일이라고는 가야금을 타는 일 외에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종일 가야금만 타면서 시간을 보냈다. 꽃피고 새우는 봄이나 녹음이 우거진 여름에는 동산에 올라 가야금을 타면서 고향을 그리워했고, 가을밤 중천의 달이 높이 솟아도 서러움에 복받쳐 두고 온 고향의 정든 얼굴들을 그리며 가야금 줄을 골랐던 것이다.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자리를 후세의 사람들은 탄금대(彈琴臺)라 부르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충주의 유명한 명소로 알려져 있어 자랑거리로 소개되고 있다.
어느 날, 이곳을 돌아보던 진흥왕은 우륵선생의 가야금 소리에 매료되어 발걸음을 멈추게 되는데, 이곳에서의 우륵과 진흥왕, 진흥왕과 우륵의 만남이 바로 가야금의 운명을 새롭게 떠오르게 해놓은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우륵 선생의 음악을 다 들은 진흥왕은 그 자리에서 신라의 세 청년에게 가야금 음악을 전수해 줄 것을 정중하게 청하였고, 그 청을 받아들인 우륵은 계고, 법지, 만덕이라는 신라의 3 제자에게 열심히 지도한 다음, 왕 앞에서 그동안의 솜씨를 선보이도록 하였다. 같은 음악을 한자리에서 듣게 된 진흥왕과 신하들의 대화가 재미있다.
진흥왕: 어떤가? 과연 훌륭한 음악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이 음악을 신라의 대악(大樂)으로 삼고자 하는데, 경들의 의견은?
신하들: 당치 않습니다. 아니 됩니다.
진흥왕: 안 된다는 이유가 무엇인가?
신하들: 가야금은 망한 나라의 악기이고 음악입니다. 어떻게 기운차게
일어나는 신라에서 망한 나라의 음악을 취하여 대 신라의 음악으로
삼겠다는 말입니까! 당치 않은 분부이니 저희는 반대합니다!!
진흥왕: 하하하, 그대들의 주장은 가야금이 있어서 가야국이 망했다고
생각하는가? 가야가 망한 것은 정치는 돌보지 않으면서 임금이
주색잡기에 빠져 스스로 망한 것이다. 그대들은 어찌 음악이 죄가
된다고 하는가!!
신하들: ???
진흥왕의 논리에 좌우에 늘어선 신하들이 더는 입을 열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가야금이라는 악기 자체와 이를 연주하고 관리하는 사람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현대사회에도 수없이 많다. 아름다운 음색도 가야금의 장점이고 우륵의 연주 솜씨도 훌륭하여 자연적으로 가야금 음악이 전승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같은 악기, 같은 음악이라도 누가 연주하고 누가 듣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는 진흥왕의 깊은 음악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천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을 대표하는 악기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가야금 뒤에는 진흥왕과 같은 깊은 안목을 지닌 음악애호가가 숨어있었다는 사실을 역사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의 고위 관료나 국회의원, 아니면 음악을 비롯한 예술관련 정책을 펼치고 있는 사람들, 그도 아니면 대기업인 중에서 1500년 전의 진흥왕과 같은 혜안을 지닌 단 한 사람의 국악 애호가가 필요한 현실이 안타깝다.
(삼국사기 원문 : 其奏之王前 王聞之大悅 諫臣獻議 伽倻亡國之音不足取也 王曰, 伽倻王 淫亂自滅 樂何罪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