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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파 이창배 선생은 1921년 여섯 살이 되어 한강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마침 집 옆에 교회가 있어서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가의 영향으로 노래를 잘 따라 불렀다고 합니다.
경서도 소리와 만나게 된 계기는 일본인 선생들이 일본음악을 가르치고 일본 노래를 부르라는 지시에 그것이 싫어서 조선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고 하지요. 어린 벽파야말로 애국자 중에서도 애국자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선생은 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 퉁소의 명인으로 알려진 고모부로부터 퉁소며 단소 등의 관악기를 배웠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서도의 명창들이 간혹 관산융마와 같은 시창을 부를 때면 선생이 단소로 반주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도 있었습니다.
선생이 본격적으로 소리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18세 무렵, 한양공업학교를 졸업하고 체신국의 전기과 측량기사가 된 이후라고 생각됩니다. 이 무렵 동네 공청에는 왕십리패나 뚝섬패의 선소리 명창들이 드나들었기에 자연스럽게 그들의 음악을 듣게 되었을 것이고, 그러다가 원범산에게 경서도 잡가를 배웠으며 학강 최경식에게 본격적으로 소리 공부를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에는 학강의 <조선가무연구회>에 가입하여 함께 공연에 참가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선생은 측량기사여서 지방 출장이 잦았는데, 그때마다 그 지방의 소리꾼들을 찾아다니며 가사를 채집하고 이를 정리해 두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이 훗날 《가창대계》라는 역저를 출간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벽파와 선소리 산타령의 인연은 선생의 나이 23살 되던 1939년, 왕십리로 이사를 한 이후, 왕십리패의 유명한 모갑이 이명길을 만날 수 있었고, 또한 인근에 살던 탁복만을 만나면서부터라 할 것입니다. 이명길이나 탁복만은 당대 왕십리패의 선소리를 이끌던 대 명창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벽파의 선소리는 왕십리패의 산타령 가락을 이은 정통적인 소리여서 60대 무형문화재를 지정할 당시, 선소리 산타령의 예능 보유자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1945년 조국이 해방되던 해에 선생은 29살이었는데, 아예 공무원의 신분을 접기로 하고 체
신국을 사임한 뒤, 전문적인 소리꾼의 길을 걷기로 결심합니다. 신분에 얽매이지 않게 되면서 아악부의 민요부원으로도 활동할 수 있었고 소리가사도 새롭게 채집하고 정리하기 시작하였으며 동료와 함께 창극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해서 대춘향전과 같은 작품을 서울의 국도극장에서 대대적으로 공연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는 한편 기생조합이었던 예성사에 출강하여 잡가와 민요와 같은 경기지방의 소리를 지도하기도 했습니다.
1949년에는 구황궁 아악부, 곧 현재의 국립국악원 촉탁이 되었으며 여기에서 소남 이주환에게 가곡이나 시조와 같은 정가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선생이 비록 경기 서도 지방의 민요를 전공한 민속 음악인이었으나, 시조와 가곡과 같은 정가를 후진 양성에 적극적으로 응용한 것은 이때 소남으로부터 배웠던 정가의 특징이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선생이 34살 되던 해, 민족의 비극 6. 25를 겪게 됩니다. 선생은 육군 군예대에 편성되어 평양을 비롯한 전선 곳곳을 찾아다니며 장병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했습니다. 아악부원들과 함께 부산의 피난생활을 했으며 환도해서는 국립국악원 예술사, 국립국악원의 부설학교였던 국악사양성소(현재의 국악고교)에서 경, 서도소리를 지도하는 한편, 돈의동에청구고전성악학원을 개원하였던 것입니다.
청구고전성악학원이야말로 근대 한국음악, 그중에서도 경서도 소리의 중심이었습니다. 졸저 《개정판 국악통론》에는 청구고전성악학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혼란해진 사회 속에서 신식 리듬의 대중가요가 우리의 귓전을 난타하였고, 우리의 소박한 민속 노래는 여지없이 침식당해 방향을 잃고 방황하게 되었다. 이에 1955년 7월, 민요계의 거장 이창배는 인멸 위기에 있는 우리 고유의 가락들을 정확하게 보존․전수하고자 <청구고전성악학원>을 개설하고, 일반인과 정규 수강생들을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동 학원에서는 일반 민요를 비롯하여 경기·서도의 입창, 잡가, 각도의 속요들을 중심으로 가르쳤고, 그 활동은 20여 년 이상 끊이지 않고 지속되었다. 민요 한 가락이라도 부른다는 사람들은 전문인이든 비전문인이든 간에 모두 이곳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동 학원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현재 현역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수십 명에 이르고,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헤아릴 수도 없으며, 인간문화재급 국창들도 모두 이곳을 거쳤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