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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63. 벽파, 이창배의 생애와 예술 <Ⅲ>

   
     
“ 1955년 7월, 민요계의 거장 이창배는 인멸 위기에 있는 우리 고유의 가락들을 정확하게 보존전수하고자 <청구고전성악학원>을 개설하고, 일반인 및 정규 수강생들을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동 학원에서는 일반 민요를 비롯하여 경기 및 서도의 입창 잡가 각 도의 속요들을 중심으로 교수하였고, 그 활동은 20여년 이상 끊이지 않고 지속되었다.

민요 한 가락이라도 부른다는 사람들은 전문인이든 비전문인이든 간에 모두 이곳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동 학원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현역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수십 명에 이르고, 사사받은 사람들은 헤아릴 수도 없으며, 인간문화재급 국창들도 모두 이곳을 거쳤다. 개원 당시만 하더라도 민요계는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부르는 사람마다 서로 다르고 식자층의 손이 닿지 못해 사설은 오류투성이로 전해질 뿐이었다.

어려운 고사나 한문구는 제 뜻을 바르게 새기지 못한 채 불러 왔기 때문에 사설 내용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왜곡된 발음이나 표현을 일삼는 예도 허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정 작업은 동 학원의 이창배 사범에 의해 하나 둘 정리되어 나갔으니, 《가요집성》《한국가창대계》 등의 여러 편저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개원 10년 만인 1965년 2월에는 수강생들 중, 가장 우수한 학생 13명에게 사회 활동이나 사범의 자격을 인정하는 첫 졸업식을 갖기도 하였다. 당시 권위를 자랑하던 서울중앙방송국에서 실시한 민속 잔치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국악 콩쿠르의 성악부는 온통 동 학원을 거친 신예들이 휩쓸었다.

1960년, 첫 발표회를 원각사에서 3일간 가졌는데, 민요를 좋아하는 전국의 애호가들이 줄을 이어 들어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민요야말로 대중들의 가슴 속 깊이 살아 있는 대중의 노래임을 확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후 연이은 발표회의 개최와 이곳을 거친 수강생들이 본격적으로 사회 활동을 개시하면서부터 <청구고전성악학원>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잊혀져 가는 민속의 가락들을 되살려 널리 보급하고, 정리 사업 등 현실적인 노력과 열성을 다하고 있는 동 학원의 위치는 국악계의 초석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서한범의 《개정판 국악통론》 중에서)

벽파는 1968년 이혜구(당시 서울대교수), 성경린(국립국악원장)과 함께 《국악대전집》과《민요삼천리》 등을 발간하였으며 1976에는 《가요집성》을 7차례 증보하여 《한국가창대계》라는 국악사의 불후의 명작을 출간하였습니다. 또한, 선소리 산타령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됨에 따라 정득만, 김순태, 김태봉, 유개동 등과 함께 예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았으며 이후 전승교육을 통하여 최창남, 황용주, 박태여, 윤종평, 백영춘 박상옥 외에도 수많은 제자를 키워냈습니다.

1983년 1월 5일, 고양군 벽제면 백란공원에 안장되었으니 선생의 나이 67세였습니다.
                                   
이상의 연보에서 벽파란 어떤 분인가? 하는 의문은 다소 해결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정리해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첫째, 벽파는 민속음악, 그중에서도 경서도 민요를 소리로 지켜온 명창이었습니다.
일제의 강제합방 이후, 문화의 암흑기를 보내야 했던 불행하고 암울했던 시대에 태어나서 전통의 소리들을 배우고 지켜온 ‘전통음악 문화의 지킴이’였습니다. 또한, 해방을 맞고 동족 간의 6. 25를 치르는 가운데에서도 민요를 부르며 장병을 위로하였고, 전쟁 후 복구에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보낸 50년대에도 경기소리와 떨어져 지내지 않았습니다.

1960년대에 4. 19 학생의거, 5. 16 군사 혁명 등등, 격변기를 맞이하면서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수용의 태세도 갖추지 못한 사이에 서양문물의 홍수를 맞게 된 우리의 현실은 전통음악에 대한 관심이나 애정은 뒷전이었던 것을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전통예술이 대중들로부터 외면당해 오던 그 시절에도 벽파는 동료며 제자들과 함께 무대를 만들고 방송을 하면서 소리판에 서 있었던 분입니다. 소리판 중심에 서서 소리꾼으로 경서도 소리를 지켜냈던 벽파의 행적은 분명히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둘째, 선생은 학문을 즐기는 학자였습니다.
1950년대, 선생이 학원을 개원할 당시만 하더라도 민요계는 실기의 명창은 있었으나 식자층의 손이 닿지 못해 서로 부르는 사설의 내용이며 발음이 오류투성이였다고 합니다. 고사에서 유래한 어려운 사설이나 4자성어의 한문구는 제 뜻을 바르게 새기지 못한 채 부르고 있어서 사설 내용도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더러는 이에 대한 왜곡된 발음이나 표현을 일삼는 예도 허다하였다고 합니다. 이론적 바탕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전수과정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일 것입니다. 구전심수로 전해지는 대부분 음악이나 노래가 그러하고 또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음악교육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정 작업은 벽파에 의해 하나 둘 정리되어 갔습니다. 늘 원고 봉투를 안고 다니던 모습이 연상될 정도로 선생은 민요 사설정리에 온 힘을 기울여 온 분입니다. 《가요집성》, 《한국가창대계》, 《국악대전집》, 《민요삼천리》 등의 논저가 이를 잘 말해 주듯 벽파는 소리꾼으로서는 흔치 않은 학자였다고 하겠습니다.

셋째, 선생은 앞서가는 국악교육자였습니다.
<청구고전성악학원>을 세우고 일반인 및 정규 수강생들을 지도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때를 같이하여 <국악고등학교>, <국악예술학교>에 출강하여 젊은 학생들에게 경기 서도의 입창 잡가 각도의 속요들을 중심으로 교수하였기에 오늘날 대학에 재직하고 있거나 전문연주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문 국악인들은 대부분 경서도 소리에 대한 높은 안목을 지니게 되었다고 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현재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공동으로 투자하여 약 2,000여 명이 활동하고 있는 <국악분야 예술강사>제도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들은 초 중등학교에 출강하여 학생들에게 민요를 비롯한 국악 전반을 지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음악교과서는 마치 구색을 맞추는 정도로 국악내용이 게재되어 있었으나 교사들은 모른다는 이유로 이것마저 지도하지 않았고 학생들 역시 배우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초 중등학교의 교육 현장에서 국악교육을 철저하게 외면해 온 교육정책은 씻을 수 없는 과오 중의 과오였으나 벽파 선생의 후예들이 교육현장에서 경서도민요를 지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음악교육에서 민요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나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