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신궁은 메이지천황의 성덕을 영원히 존경하고 사모하고자 국민들의 뜨거운 정성으로 만든 곳입니다. 이곳은 메이지천황과 쇼우켄황태후의 신령을 기리는 곳으로 정초 신사 참배지로 전국최고의 참배자 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메이지신궁의 한국어판 자료에는 친절하게 메이지신궁의 역사와 경내도 그리고 신사참배 방법 등이 자세히 쓰여 있다. 젊은이들의 거리인 하라주쿠와 NHK방송국에서 가까운 이곳은 일본 최고의 신사참배지로 부각되고 있을 뿐 아니라 꽃창포 정원으로 유명하여 종종 일본인 친구들이 나를 이곳으로 안내하곤 한다. 육중한 도리이를 지나 20여만 평에 이르는 경내에는 명치왕 사후에 전국에서 보내온 10만 그루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어 마치 원시림에 들어선 기분이다.
일본의 신궁(神宮)은 신사(神社)나 대사(大社) 보다는 급이 높은 곳이지만 신사이든 신궁이든 한국의 사당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이들 시설은 죽은 자의 영혼을 기리는 시설이라는 점에서는 한국의 사당과 같은 역할이지만 다른 점은 문중 단위가 아니라 전 국민이 참배한다는 점에서 좀 독특하다. 또한 메이지신궁 같은 곳과 달리 후시미이나리대사 같은 곳은 농업번창의 신을 모시는 등 반드시 죽은 자를 모시는 공간이 아니라는 점과 신사마다 모시는 신이 제각기 다르다는 점도 한국의 사당과 다른 부분이다.
이러한 일본의 신이나 죽은 자를 기리는 사당인 신사를 일제는 조선 천지에 잔뜩 세웠다. 특히 총독부가 설치되면서부터 대한제국의 국가적인 제례의식을 대폭 축소하고 조선신궁을 세워 일본의 신도적 국가질서 속에 조선인을 흡수하려했다. 1936년 8월 신사제도 개정에 대한 칙령이 발표되고 황민화정책의 상징으로서 신사제도가 행정구역별로 재정비·신설되어 1면(面) 1신사(神社) 설치를 강행한 이래 1936년에 524개였던 신사가 1945년에는 1,062개로 급증했다.
일제의 내선일체를 표방한 황민화정책 수행 과정에서 자신의 조상신을 버리고 강제로 일본신을 모시는 신사참배를 강요당한 조선인들은 1930년대 중반부터 국민의 사상통제가 강화되어가면서 신사참배, 궁성요배, 일장기게양,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제창 등을 강요받아야만 했다.
이러한 씁쓸한 경험을 가진 부모세대의 삶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아름다운 꽃창포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드리 수목이 우거진 명치신궁 정원 안의 멋들어진 레스토랑 분위기도 영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인간이란 지금 이 순간만을 즐기면 그만일 수 없는 존재란 것을 새삼 느껴본다. 일본 땅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