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최미현 기자] “우리 부모님을 불쌍히 여기소서/ 얼마 안 있어 영원히 이별하게 되나이다/ 하늘님 이를 불쌍히 여기시어/ 표식을 아버님 집으로 흘려보내소서/ 하늘에 빌고 절하며 통곡합니다. (哀我父母, 幾乎永訣, 天其矜怜, 標送父家, 祝天拜哭)
이는 박계곤(朴繼崑;1675~1731)이 36살 되던 해 제주목(濟州牧)의 말단 관리로 임명되어 한양으로 떠나는 전 목사 최계옹의 배편에 조정에 헌상할 물건을 가득 싣고 출발하다 그만 풍랑을 맞아 사서도(지금의 추자면 소재섬)에 표류하여 죽음을 눈앞에 두고 부서진 배의 나뭇조각에 쓴 글이다.
식량도 다 떨어지고 육지와 연락이 닿을 만한 그 어느 것도 없는 상황에서 아버지의 안위가 염려되어 혹시라도 아버지가 사는 마을에 닿을까 싶어 간절한 심정으로 표류 사실을 쓴 것이었다. 때마침 아들이 떠난 뒤 광풍으로 바다가 미친 듯이 파도가 심하자 아버지는 혹시 아들 배가 침몰되지 않았나 걱정이 되어 갯머리에 나와 바다를 바라다 보던 중 아들이 흘려보낸 나뭇조각의 글씨를 보고 풍랑을 만난 것으로 판단하여 곧바로 관가로 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당시 목사는 백시구였는데 곧바로 배를 보내 죽음에 다다른 여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에 사람들은 박계곤의 효성이 하늘에 닿아 많은 인명을 구한 것으로 알고 칭찬이 자자했다. 이 이야기는 조정에도 전해져 정조실록 39권 4월 22일 기록에 보면, “제주 사람 박계곤은 효성이 뛰어났습니다. 일찍이 일이 있어 서울에 올라오다가 바다 가운데서 파선이 되어 표류하여 곧 죽게 되자 배의 널빤지에다 몇 구절의 글을 적어서 부모를 영결하고는 하늘에 빌면서 이를 밀물에 띄워보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그 널빤지가 그의 아비 문전에 도착하였으므로, 그의 아비가 널빤지를 가지고 관청에 가서 알림으로써 날랜 배를 보내어 그의 시신을 싣고 돌아왔습니다. 그리하여 섬사람들이 지금도 계곤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라고 말합니다.” 정조실록에는 박계곤이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 밀양박씨 종중에서 펴낸 《宗報, 24호》에는 그 뒤 박계곤의 행적이 기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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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계곤 이야기가 실려 있는 밀양 박씨 종보 |
박계곤은 숙종 46년(1720) 6월에 임금이 승하하자 지난날 제주 흉년 때 임금이 식량 등을 보내 도와준 것을 생각하여 통곡한 뒤 10월에 능역(陵役)에 제주 도민들과 한양으로 상경하여 참가하게 된다. 그러나 그때에도 풍랑을 만나 갖은 고생 끝에 35명이 한양에 도착하여 능역작업에 힘을 보태는데 능역 작업 가운데 가장 힘든 재궁(梓宮)을 모실 곳을 회(灰솔)와 솜(綿)과 기름으로 혼합하여 다지는 작업에 종사하게 된다.
워낙 일이 힘들어 제주의 소리꾼인 남호현에게 선소리를 하게하여 사기충천으로 능역에 임했는데 그때 부른 노래는 다음과 같다. “선대왕의 크나큰 덕을 이고 싶도다 (願戴先大王聖德兮) 명릉의 역사는 뜻밖의 일이로다(意外明陵之役事) 불쌍한 제주 백성의 외로움이여(可憐濟州民之孤獨兮) 천리길을 멀다 아니하고 산능의 역소로 나왔지만(不遠千里赴山陵之役所) 슬프도다 선대왕께서 승하하심이여(噫先大王之昇遐兮) 누구가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실꼬(誰爲我而愛憐) 엎드려 하느님께서 소감하심이 있기를 비오니(伏願旻天之有照兮) 만백성을 대신하여 임금님을 돌보소서(代萬民而回天顔)”
이 소식을 들은 인원대비(仁元大比)가 10월 그믐날과 동짓달 초하룻날에는 별감(別監)을 보내어 차비문(差備門)까지 제주 능역군을 부르시고 위로하며 언문(諺文) 교지(敎旨)를 다음과 같이 내리셨다.
“선대왕(숙종)이 너희 섬 백성들을 걱정하시었는데 너희들이 나라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산과 바다를 건너와서 능소(陵所)에 나아가 부토(負土)하기에 이르렀고 진헌(進獻) 물종(物種)까지 마련하여 왔으니 민정(民情)이 또한 가상하고 비통하기 그지없다” 라고 하고는 피륙 등 수십 종의 물건을 하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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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씨 열녀 비석과 충비 고소락을 기리는 곳 |
박계곤은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에 효도하고 충성으로 나라를 섬긴 사람으로 영조 7년인 1731년 57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부인 유 씨와의 사이에 3남 2녀를 두었는데 자식들도 모두 훌륭히 키웠다. 그는 틈만 나면 자식들에게 말하길 “우리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지만 이만큼이라도 지내게 됨은 하늘님의 은혜요, 조상님의 음덕이다. 무릇 자기의 몸을 바르게 닦아 언행을 삼가고 효제(孝悌)하며 주색을 삼가고 어른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에게는 친절히 하라. 부부는 화합하여 맡은 바 직분을 다하고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지 말고 이웃에 어려움이 있으면 보수를 바라지 말고 도와줄 것이며 항상 자기의 마음을 속이지마라”고 가르쳤다.
그래서일까? 박계곤의 둘째딸이 청상과부로 살면서 정절을 지킨데다가 그의 몸종이었던 고소락(高所樂)마저 박 씨 부인과 함께 60여년을 충비(忠婢)로 주인을 섬겨 박 씨 문중의 충(忠), 효(孝 ), 열(烈지)에 대해 후세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지금 제주 아라동 1201번지에는 박 씨 열녀 비석과 충비 고소락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서 있으며 애월읍 신엄리에는 1794(정조 18년) 심낙수 어사가 이를 정려(旌閭)하여 ‘박씨삼정문(朴氏三旌門)'의 이름을 내리고 정려기와 신사를 지어주어 후손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