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오는 2014년 2월 28일까지 안동독립운동가 어록전이 열린다 일제강점기 치열하게 펼쳤던 안동독립운동가들은 과연 어떤 말들을 남겼을까? 이제라도 안동독립운동가들의 가슴 절절한 외침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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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지혜가 밝지 못하고
일은 모험을 하지 않으면 성공 할 수 없다
어려운 것으로부터 평탄해지나니
평탄하고 쉬운 것은
다 험난한 것으로부터 생겨난다
-험난‘險難 중에서-
이 일을 시작할 즈음에
심장과 허파가 쪼개지는 듯한 아픈 가슴으로
동포에게 알리노니
따라오라
그렇지 않으면
죽느냐사느냐의 갈림길이 되리라.
-협동권역 중에서(황성신문,1908년 10월 7일)-
*류인식 (1865-1928)독립투사는 누구인가?
1893년(고종 30) 과거를 보려다가 과거제도의 문란과 조정의 부패상을 보고는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이중업(李中業)·이상용(李相龍)·박재중(朴在重)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가 관군에게 패하여 10여 년 동안 피신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유근(柳瑾)·장지연(張志淵)·신채호(申采浩) 등과 만나 나라를 걱정하던 중, 신채호의 영향을 받아 개화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리고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국권을 강탈하자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였고, 1907년 고향에 협동학교(協同學校)를 창설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동지들과 함께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를 창립하여 영남지방의 교육구국운동을 펼쳤으며, 대한협회(大韓協會)에도 가입, 활동하였다. 1907년 11월양기탁(梁起鐸)·안창호(安昌浩)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든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경상북도지회에서 활동하였다.
1910년 국권이 강탈된 뒤 신민회가 독립군기지 창건과 무관학교 설립을 위해, 서간도 이주를 계획, 실행할 때 양기탁·이동녕(李東寧)의 요청으로 1911년 서간도 봉천성 유하현(奉天省柳河縣) 신흥강습소의 민간조직인 경학사(耕學社)의 교무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13년 흉년으로 경학사의 운영이 실패하자 귀향하였다. 1920년이상재(李商在)·유진태(兪鎭泰) 등과 함께 전국교육기관을 통일하여 조선교육협회를 창립하고, 같은 해 박중화(朴重華) 등과 함께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설립에도 참가해,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다.
1923년 3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朝鮮民立大學期成會) 발기총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선전부장으로서 경상남북도를 순회하면서 지방부를 조직하였다. 1927년 2월 서울에서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자, 이를 적극 지지해 안동지회를 창립하고 회장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출처: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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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독립운동가 어록전시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