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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발음 좀 잘 합시다.

성악가들이 배워야 할 우리말 발음법

[그린경제=김동규 음악칼럼니스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밀라노 두오모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의 얘기다. 기도문을 읽으시다가 '밀라노의 수호성인 성 암브로시오 (Santo Ambrosio da Milano)'를 발음하시는데 이태리어를 잘 하시지만 폴란드 출신이라 발음이 서툴러 'Santo Ambrosio dammi L’ano) 라고 읽으니 듣는 사람들은 '암브로시오 성인이시어 나에게 항문을 주소서'로 잘못 알아듣는 황당한 경우가 생기는 바람에 한동안 외설적인 유머가 나돌았던 적이 있다. 

나는 어려서 국어 점수가 좋았던 적이 거의 없었는데 아마도 정신이 산만하여 주제 파악을 잘 못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맞춤법과 발음법의 경우는 참으로 억울하다. 요즘의 우리말 맞춤법과 발음을 보면 내가 어릴 적에 틀렸던 문제들이 지금은 정답으로 바뀐 것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말을 이렇게 변화시킨 상대가 누군지 알아내어 내 점수 돌려달라고 소송을 걸고 싶은 장난기도 발동한다. 나는 비록 국어 점수는 안 좋았지만 어려서 이미 언어 진화의 선두주자였었다고 농담을 한다.
 
성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발성과 발음의 중요성을 알게 되어 특별한 관심을 가지다가 유학을 가서는 우연히 이태리어의 발음법(Ortoepia, 정음법)을 배우는 행운을 가졌다. 나의 스승은 스테파노(Stefano). 내가 입학한 산타체칠리아 국립음악원의 체육관(Palestra)에서 일반 체육이 아니라 악기 연주자들의 근육의 경직과 피로를 풀어주는 신체교정운동을 지도하는 분이셨는데 그의 장모가 전설적인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Greta Garbo)의 성우를 하신 분이라 선생님도 연기자와 성우를 위한 발성을 연구하는 모임을 같이 해오고 있다 하셨다.
 
당시 나의 피아노 선생님은 내가 어려서 가운뎃손가락의 인대가 끊기고 뼈는 일곱 조각이 난 사고로 손가락 경직 증상이 있는 걸 보시고 안타까워하시며 나를 스테파노 선생님에게 보낸 것이다. 스테파노 선생님은 나의 손을 보시고 끊어진 인대를 다시 연결하다가 짧아져서 생긴 경직이라 별 방법이 없다 하시면서 대신 내가 성악을 전공하는 외국인이니 손가락 교정 대신 이태리 발음을 교정해주시겠다는 제의를 하셨다.
 
6달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의 열정을 보시고 선생님은 거의 무제한으로 보통 하루 3-4시간의 특별 개인 전수를 해주셨다. 세세한 자음과 모음의 발음 그리고 문장에서의 억양과 강세를 집중적으로 공부하였다. 이태리에도 한때는 발음법(Ortoepia, 정음법)이 배우나 성악가 그리고 성우들을 위한 전통적인 필수적 분야였는데 점점 사라져간다는 한탄을 자주 하셨다.
 
나의 손가락 경직 문제는 피아노 이수를 못하면 음악원 졸업도 못할 것이기에 결국 자퇴하면서 학교를 옮기는 사건으로 이어졌지만 스테파노 선생님 덕분에 이태리어 발음법과 악기 연주자들의 신체교정 원리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또 일주일에 한 번은 교외의 온천에서 수중발성 체험도 하였기에 지금도 나는 배영으로 물에 떠서 노래를 한 곡 부를 수 있다. 선생님의 퇴임과 함께 음악원의 체육관(Palestra)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나중에 들었지만 나의 유학 초기에 가장 값진 시기를 보냈다고 회고한다.
 
비록 출판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전수받은 이태리어 발음법(Ortoepia)에서 알파벳의 자모음마다 음소(fonema)의 명확한 발음이 좋은 발성을 하도록 도와준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한때 나는 성악과 연기를 위한 딕션(Diction, 발성과 발음)에 대한 책을 반쯤 준비하다 말기도 하였었다.
 
귀국하여 학생들에게 성악의 발성과 발음을 가르치면서 가끔씩 모호한 질문을 받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학생 말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악가의 음반을 들어보니 내가 설명한 이태리어 발음과 좀 다르더라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학생에게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미국의 영문과 교수님은 발음이 다 좋을까? 한국의 국문과 교수님들은 한글 발음이 다 좋을까?
언어장애를 가진 국문학자나 영문학자도 있지 않을까? 외국인이 우리나라 판소리를 하면 그 발음의 느낌이 어떨까? 우리가 외국 사람에게 그들의 모국어로 노래를 불러주면 그들은 어떻게 느낄까?
 
그러면서 같은 이태리 사람이라도 어느 지방 출신인가에 따라 또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 발음과 억양이 다른 것은 당연하며 성악가들도 자국어가 아닌 외국어 노래를 할 때는 발음이 완벽하지는 않을 것이 당연하지 않겠나 하는 얘기를 해준다. 그리고 덧붙여서 정확한 발음이 물론 중요하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발음을 하면서 일어나는 내면적인 느낌이 그 단어의 의미에 맞게 소리로 표현되고 있느냐가 예술의 관건이 아닐까 하는 조언를 꼭 해준다.
 
요즘 국내에서 성악을 배우고 바로 국제 콩쿨에서 입상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성악의 발성법이 많이 좋아졌고 또 외국어가 보편화되면서 정확하게 발음하는 법과 언어적 느낌을 노래로 적절하게 표현하는 법까지 가르치는 유능한 선생님이 이제 우리나라에도 많아졌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외국어 노래의 발음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에는 우리말 한글의 우수성이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한글의 발음 체계는 조합에 의해서 어떤 어려운 외국어라도 쉽게 본토 발음에 근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음에도 정작 우리말 가곡에 대한 발성과 발음의 연구가 혹시나 도외시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름다운 우리말 시어를 가진 한국가곡이 보급된 지도 꽤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음악대학에 이태리어, 독어, 불어, 영어 등의 발음법 수업은 있어도 우리말 발음법 수업은 없다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방송에서 들려주는 한국가곡들 중에는 간혹 한글의 <ㄹ>발음을 이태리어의 <rr>로 발음하는 사례들이 있는데 이제 없어질 때가 되지 않았겠는가.
 
그러면서 우리말 한글의 발성과 발음에 대한 연구가 국어학자와 성악가, 성우, 연기자 등 언어관련 예술 분야를 위한 정규학습과정으로 이어지는 정통성 있는 체계가 필요하겠다는 제안을 해 본다.
 
언어는 속성상 세월이 지나면서 당대 사람들의 습성에 맞추어 언어들마다 철자법(Ortografia)과 발음법(Ortoepia)이 편한 쪽으로 진화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글로벌 시대가 되면서 언어들마다 새로운 현대의 조어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이러한 언어의 외형적인 변화 속에서도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언어가 담고 있는 인문학적 내용이 아닐까.
 
우리말을 제대로 발음하는 것에 더하여 우리의 언어가 고차원적으로 담고 있는 인문학을 이해하는 예술가를 양성하는 교육에도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도리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사실 교황의 발음 실수는 일상의 우연한 웃음거리일 뿐이며 그가 말하려 했던 것을 실제로 잘못 알아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성악가로서 노래 가사의 대부분이 깊이 있는 외국의 문학작품임을 고려하니 내가 부르는 노래가 듣는 이들에게 감흥을 주려면 발음, 발성, 그리고 표현까지 3가지가 서로 잘 조화를 이루려면 좀 더 심층적인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가수란 보기에는 화려하지만 실제로 준비할 것이 많은 중노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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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세페 김동규
** 김 동규 (예명_ 주세페 김)
다재다능한 엔터테이너(팝페라테너, 예술감독, 작곡가, 편곡가, 지휘자, 음악칼럼니스트)로 아내 김 구미(소프라노)와 함께 국내유일의 팝페라부부 '듀오아임'이라는 예명으로 공연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