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암사 전경 건물은 다 없어지고 기단과 주춧돌만 남았다
기단으로 당시의 규모를 짐작해본다.
기단으로 오르는 계단
계단
당간지주
널부러진 기둥을 받치던 주춧돌들
기단돌들도 흩어지고
계단 옆 소맷돌
임자가 누구인지 궁금한 스님 사리탑
사리탑의 상륜부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조선조 배불정책으로 전국의 수 많은 절들이 없어되거나 축소되었지만, 한때 조선의 국찰로 융성하였던 회암사 !!
조선초 인도의 지공화상 그의 제자 나옹화상 그리고 그의 제자이면서 태조 이성계와 막역한 사이였던 자초 무학대사가 주석하여 조선의 국찰로 명성을 얻었던 회암사 !
다른 큰 절들은 깊은 산속에 있기에 들리기 쉽지 않지만 회암사는 명나라 사신들도 한국 절을 보기 위해 많이 들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회암사는 성종의 어머니로 잘 알려진 인수대비가 불교를 중흥시키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고, 그의 뜻대로 중창불사까지 이루어졌으나, 낙성을 보지 못하고 폐사가 되고 만 비운의 절이었다.
회암사의 중창을 거의 다 마치고 낙성만 남은 상태에서 갑자기 인수대비가 승하하여 모든 행사는 취소되어 버렸으며, 인수대비가 사라지자 유림들의 빗발치는 상소에 절은 힘을 잃고, 절을 중창하기 위해서 온 힘을 기울이던 허웅당 보우대사는 붙잡혀 제주로 귀양을 가서 제주목사 변협의 고문으로 제주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런 이후로 회암사는 그 누구의 소행인지도 모르게 불이나서 중창의 낙성도 보지 못하고 불속의 잿더미로 다 타버리고 말았으며. 폐사가 되고 난 이후로는 계곡에 절터를 메운 흙에 몇길이나 쌓이게 되었다. 그런 상태로 최근까지 내려오다가 최근에 몇길의 흙을 걷어내고 발굴 조사를 마무리하여 당시 중창했던 절의 규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회암사는 발굴 조사결과 지금처럼 모든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절이 아니고, 왕실의 임금과 왕비가 왔을 때 거처할 수 있는 잘 갖춘 왕실사찰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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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수리기술사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사진활동은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해리티지채널사진기자, 포토클럽 회원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