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정석현 기자] 이 비는 땅이름을 따서 삼전도비(三田渡碑)라고도 한다. 1636년(인조 14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였는데, 그해 12월에 청태종이 다시 조선을 침입하니 이것이 바로 병자호란이다. 청군이 서울에 가까이오자 인조(仁祖)는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하여 항쟁을 꾀하였으나, 청군의 포위로 지원병과 군량의 보급로가 차단되었으므로 할 수 없이 항복하게 되었다. 그 뒤 인조 17년에 바로 항복의 예를 행한 자리에 청의 강요로 그 사실을 기록한 비를 세운 것이 바로 이 비인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청이 조선에 출병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과 항복한 뒤에 청황제는 우리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했다는 것이 중심이다. 글은 이조판서 이경석(李景奭)이 지었는데, 처음에 비문을 짓도록 명을 받은 것은 장유(張維)·이경전(李慶全)·조희일(趙希逸)·이경석(李景奭)의 4명이었다. 이들은 이를 치욕이라하여 거부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 이경석의 글을 다시 고쳐 짓도록 한 것이 지금의 비문이다.
비는 비신(碑身)과 이수(螭首)가 하나의 돌로 된 통비(通碑)의 형태이며 석질은 대리석이고, 귀부(龜趺)는 방형좌대 위에 놓여 있다. 비의 앞면 오른쪽 절반은 만주문자 20행을 왼쪽 절반은 몽고문자 20행을 새겼고, 그 위에 횡서로 만주문자와 몽고문자로 된 제목을 새겼다. 그리고 뒷면에는 한문으로 된 비문을 새겨 한 비 안에 3개국의 문자가 들어 있는 희귀한 비이다.
이 비는 세워진 뒤 두 차례나 매몰되는 기구한 운명을 겪기도 하였는데, 처음은 일제 때의 일로 본비가 조선 사람들의 모일모화사상(侮日慕華思想)을 조장하는 것이 된다하여 땅 속에 묻었던 것이고, 두번째는 1956년 당시 이승만 정부에서 국치(國恥)의 기록이라 하여 파묻었던 일이다. 그 뒤 비석이 장마비로 말미암아 드러나게 되자 강 언덕 비탈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것을 다시 원위치보다 송파쪽으로 조금 옮긴 지금의 위치에 세우게 되었다
연대: 1639년(인조17년)
사적: 사적 - 제 101호
크기:높이 323cm, 폭 145cm, 두께 39cm
소재지: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 187번지
출처: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