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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라고 외친 이광수와 창씨개명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2689]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1940년 2월 12일 치 동아일보를 보면 “금일부터 창씨제를 실시“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옵니다. 기사의 내용을 보면 “내선일체(內鮮一體, 1937년 일제가 전쟁협력 강요를 위해 취한 조선통치정책)에 획기적 중요성을 보이는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 개정에 따라 조선의 창씨제(創氏制)는 오늘의 빛나는 기원가절을 복하야 전조선에 일제이 시행하기로 된 바”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사 내용을 보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도구인 “내선일체”의 하나로 총독부가 조선인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한 것이지요.


   
▲ "창씨개명제"를 실시한다는 동아일보 1940년 2월 12일 기사

그날 아침 관리들이 문을 여는 시각을 기다려 가장 먼저 달려가 등록을 마친 사람은 조선 최고의 작가라는 이광수였습니다. 그가 창씨개명을 한 까닭을 직접 그의 말을 통해서 들어봅니다.

“내가 향산(香山)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한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어명과 독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香山光浪)이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게 살기 위해 창씨개명한다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만해 한용운 선생은 최후의 발악적인 일제말기 총동원체제 아래 자행된 황민화정책의 거센 파도 속에서도 민족 정기를 꺾지 않았고,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 등을 펴기도 하였지요. 똑같은 지식인임에도 어떤 이는 가장 먼저 뛰어가 창씨개명을 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온갖 일제의 협박 속에서도 굳건히 창씨개명을 반대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