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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미국에서 독립운동 뒷바라지한 ‘차경신’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미국에서 독립운동 뒷바라지한 ‘차경신’

 

 

                               이윤옥

일제가 조선의 독립투사에게

극악한 일을 했다 해도

장작 피고 그 위에 사람 집어넣긴

임의 엄니가 처음일 거외다

 

어머니 불구덩이에서 건져 올려

벗겨진 살 틈으로

벌건 피고름 흐르던 날

 

딸로서 해드릴 것 없던

그 통한의 눈물은

한 평생 임의

독립투지 자양분 되었어라

 

누렁 호박 익어 가는 고향 평안도 떠나

북풍한설 만주 땅 누비다가

이역만리 미국에서

목 터져라 부른 독립의 노래

 

고향땅 그 누구 있어

귀담아 들어줄거나

 

   
▲ 중국 망명시절 차경신 애국지사(왼쪽)


언어와 의복 같은 동족이

한마음 한뜻 든든하구나

원수가 비록 산해 같으나

자유의 정신 꺾지 못하네 -국혼가 가운데서-

 
역사가 오래된 나의 한반도야

내 선조와 유적을 볼 때에

너를 사모함이 더욱 깊어진다.

한반도야 -한반도 가운데서- 

차경신 (車敬信, 모름 ~ 1978.9.28) 애국지사의 동생 차경수 선생은 경신 언니가 죽고 나서 유품을 정리하던 중 언니 수첩에 고국을 사모하는 노래, 절개의 노래가 여러 종류 적혀 있었다면서 《호박꽃 나라사랑》에 여러 편의 시를 소개했다. 위 시는 그 가운데 일부다. 낯설고 물선 남의 땅 중국에서 부모형제와 떨어져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오매불망 고국을 사랑하는 심정을 적어 놓은 유품을 정리하던 동생의 마음은 어땠을까를 생각하니 코끝이 찡하다.

   차경신 애국지사와 가족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써내려간 차경수 선생의 《호박꽃 나라사랑》에는 언니 차경신 뿐만이 아니라 어머니의 독립운동 이야기도 선명하게 기록되어있다.

 “언니(차경신)와 어머니(박신원)가 독립운동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왜경은 어머니의 뒤를 조사하여 체포하려 하였다. 어머니는 친척집 곳간 독 뒤에 숨어서 햇빛도 못보고 나타나지 않았으며 이웃이라도 알까봐 몰래 음식을 갖다 드렸다.(가운데 줄임) 집주인이 외출하자 왜경들은 우루루 고씨 집안으로 들어가더니 손에 잡히는 가구를 마당으로 가지고 나와 불을 질렀다. 그리고는 어머니를 불에 태워 죽이려고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어머니를 붙잡아 불구덩이로 밀어 넣었다. (가운데 줄임) 일제 강점기 애국지사들을 감옥에 가두고 악형을 한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았지만 어머니처럼 때려서 불구덩이에 집어넣는 일은 들어 보도 못한 극형이었다.”

 차경수 선생은 어린 시절 어머니와 경신 언니의 만주에서의 활동을 소상히 기억하여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참으로 일제가 한 짓은 천인공로할 일이었다.

 차경신 애국지사는 평북 선천이 고향으로 1892년 쌀장사를 하던 아버지 차기원과 어머니 박신원 사이에서 큰딸로 태어났다. 일찍부터 어머니의 기독교 신앙을 토대로 여성도 배워야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던 어머니 덕에 16살에 보성학교를 거쳐 정신여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2월에는 일본 요코하마여자신학교에 유학하였는데 이때 동경에서 있었던 2·8독립선언을 보면서 국제정세 변화를 독립운동의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마침 유학 와 있던 김마리아와 함께 동지가 되어 비밀리에 2·8독립선언문을 가지고 입국하여 대구로 갔다. 그곳에서 김순애와 서병호를 만나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를 꾀해 부인회를 조직한 뒤 평북 선천에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이름으로 50여명의 회원을 모집하고 3월 1일에 독립선언을 하고 만세운동에 나섰다.

 1919년 11월 무렵에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의 총무 겸 재무로 뽑혀 국내외를 다니면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2월에는 국내 여성독립운동 상황을 시찰하고 격려하기 위해 각처를 돌아 다녔으며 삼도여자총회(三道女子總會)를 열어 결속을 다졌다.

 이듬해 1920년 3월 1일에는 평북 선천군에 있는 보성여학교와 신성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차경신 애국지사는 보다 구체적으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1920년 8월 상해 임시정부로 건너가 도산 안창호를 도와 국내를 오가면서 비밀요원으로 활약하였다.
 

1921년 1월에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부인향촌회(婦人鄕村會)와 연계하여 군자금을 모금하였으며, 같은 해 9월 정애경· 최윤덕 등과 여자연합단(女子聯合團)의 대표로 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하였다. 10월 26일에는 평남 평양부 김상만이 모금한 4백여 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조국독립운동을 뒷받침하는 자금조달에 일익을 담당하다가 1921년에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상해 홍십자(紅十字)병원에 입원하기도 하였다.
 

1924년 1월 미국으로 건너간 차경신 애국지사는 초대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 회장과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회원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고, 로스앤젤레스에 한국어 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으로 교포 자녀들의 교육에 진력하였다. 1931년 로스앤젤레스 한국어 학교 교장직을 그만두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애국부인회 총본부가 로스앤젤레스로 옮기게 되자 1932년부터 1939년까지 애국부인회 총단장에 재임하면서 각지에 지회를 조직하는 등 활동하였다.
 
  

애국부인회에서는 임시정부, 독립신문사, 광복위로금,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군축선전비, 만주동포구제금 외에도 국내 수재의연금, 고아원 원조비 등 독립운동과 구제사업을 위해 힘썼다. 1924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54년 동안 조국광복의 날까지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조달과 여성교육에 큰 몫을 담당했던 차경신 애국지사는 1978년 9월 28일 로스앤젤레스 작은 마을에서 숨졌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차경신 애국지사를 비롯한 항일여성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 1~4권에 80여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