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조선 전기만 해도 우리나라는 고려시대 가족제도를 이어받아 아들과 딸이 똑같이 재산을 나누는 “균분상속제”였으며, 제사도 아들은 물론 딸도 함께 지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족제도는 임진왜란 이후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지는데 16세기 초 이래로 균분상속제가 무너지고 장자상속으로 바뀌어가면서 부계중심의 가족제도로 굳어집니다. 그와 함께 입양 사례가 빠르게 늘어나는데 이는 장자상속이 보편화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장자상속과 그에 따른 입양사례를 가장 실감나게 엿볼 수 있는 것이 보물 제482-5호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고산양자 예조입안(禮曹立案)’> 문서입니다. 이 문서는 선조 35년(1602) 6월 초 이틀에 윤유심(尹唯深)의 둘째아들인 선도를 윤유심의 형인 유기(唯幾)에게 양자로 들일 것을 예조(禮曹)에서 허가한 결재문서지요. 이를 보면 양쪽 집안의 동의서, 동성과 이성(異姓)권의 보증서를 확인하고 《경국대전》 <입후(立後)>의 규정에 따라 나라에 이를 허가하여 달라는 청원서를 냈는데, 이를 좌랑, 정랑, 참의, 참판, 판서가 수결(지금의 서명)하여 허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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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산 윤선도의 입양을 허락한 예조의 <고산양자 예조입안(禮曹立案)’> 문서 |
이렇게 양자를 들이기로 한 것에 대해 나라가 문서로 허락한 것을 보면 입양을 맘대로 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동시에 이 문서는 장자의 혈통을 증명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요. 그래서 만약에 있을지도 모르는 직계혈통에 대한 시비나 재산권 상속에 있어서 중요한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해남윤씨가는 다른 가문에 견주어 입양을 통해 대를 이은 경우가 많은데 이는 고산의 아버지인 윤유기(1554~1619)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어초은 윤효정 이래 12대 윤광호에 이르기까지만 종손으로 4명이 입양되어 종통을 이었지요. 따라서 입양은 해남윤씨가의 특별한 가풍이 되었으며, 어쩌면 그 덕에 그 많은 재산이 흩어지지 않고 이어갈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