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나는 조운선(漕運船) 70여 척이 바람을 만나서 표류, 침몰하였다는 것을 듣고, 그 배에 탔던 천여 명의 사람이 다 빠져 죽었을까 하여 아침저녁으로 걱정했었다. 이제 너의 글을 보니 내 마음이 기쁘다. 네가 빨리 소식을 올려 내 걱정을 풀리게 하였구나. 내 이를 아름답게 여겨 특히 옷 한 벌을 내리니, 너는 이를 받을지어다.” 이는 《세종실록》 1443년(세종 25년) 6월 8일치 기록입니다. 여기서 조운선이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때 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물과 생활용품을 한양으로 운반하는 데 사용하였던 배를 말합니다.
특히 고려시대 전남지방의 수령현(遂寧縣, 현 장흥), 죽산현(竹山縣, 현 해남), 회진현(會津縣, 현 나주) 등지에서 사용하였던 조운선 ‘마도 1호선(1208년 제작)’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충남 태안 마도 앞바다에 침몰한 것을 2010년 수중 발굴한바 있으며 10월 3일까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이 배를 복원할 예정입니다. 고려시대에 앞서 신라시대에는 해상왕 장보고가 이미 뛰어난 배를 만들어 아시아의 해상활동을 장악한 역사가 있습니다만 해상에서의 선박 침몰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 큰비가 와 백성이 물에 떠내려가는데도 현령 이승인은 불구경하듯 했다. 지금 공직자들은 그런 사람이 없을까?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안변 현령(縣令) 이승인(李承仁)은 재임시절 큰 비로 냇물이 불어 민가 60채가 떠내려가고 20여명의 노약자와 여성들이 물에 빠져 죽는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제사를 핑계로 나와 보지도 않았고 뒤늦게 나와서는 먼 산 불구경하듯 했다고 《명종실록》 6권(1547년) 9월 10일에서 꾸짖고 있습니다. “백성이 물에 빠져죽고 재산 손실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끝내 구할 뜻이 없었으니, 이는 군명(軍命)을 의식하지 않은 것으로 사건에 대한 인식이 매몰된 것입니다.” 현령의 무책임한 태도에 명종은 그의 죄를 낱낱이 캐물어 응당한 처벌을 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나라의 녹을 받는 사람들이 이 지경이면 백성의 무고한 목숨은 늘 위태로울 수밖에 없지요. 지금 우리 국민 모두는 세월호 참사에서 희생당한 학생들을 생각하면서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