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참봉 흥우(興宇)이며, 어머니는 현감 조희맹(趙希孟)의 딸이다. 1605년(선조 38년)에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으로 들어갔다. 1609년(광해군 원년)에 동료 태학생들과 함께 청종사오현소(請從祀五賢疏)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당하자, 성균관을 떠나 경기도 가평 잠곡 청덕동에 은거하였다. 1623년에 서인의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며, 이듬 해2월에는 증광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 해 10월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이후 계속 승진하여 1649년 5월에는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대사헌이 되고 이어 9월에 우의정이 되자, 대동법의 확장 시행에 적극 노력하여 충청도에 시행하는 데 성공했다. 1654년 6월에 다시 영의정에 오른 후에는 대동법의 실시를 한층 확대하고자 「호남대동사목(湖南大同事目)」을 구상하고, 이를 1657년 7월에 효종에게 바쳐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건의하였다. [그린경제/얼레빗 = 정석현 기자] 1664년(현종 5년)에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에 건립된 김육(金堉)의 신도비이다. 비의 찬자는 이경석(李景奭)이며 서자는 김좌명(金佐明)이다. 비문에 따르면 김육(1580∼1658년)의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이다.
▲ 김육 신도비(金堉 神道碑)
그러나 이 건의에 대한 찬반의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죽어, 이 사업은 그의 유언에 따라서 서필원(徐必遠)에 의해 뒷날 성취되었다. 저술로는 그의 시·문을 모은 『잠곡유고(潛谷遺稿)』(11권 10책)·『잠곡별고(潛谷別稿)』·『잠곡유고보유(潛谷遺稿補遺)』·『잠곡속고(潛谷續稿)』가 전한다.
양근(楊根) 미원서원(迷源書院)과 청풍 봉강서원(鳳岡書院), 강동(江東) 계몽서원(啓蒙書院),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 등에 배향되었고, 1704년(숙종 30년)에는 가평의 선비들이 건립한 잠곡서원(潛谷書院)에 홀로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조선 후기 화폐의 주조·유통, 수레의 제조·보급 및 시헌력(時憲曆)의 제정·시행 등에 착안하고 노력한 실학자 김육의 행적과 성품 및 가족 등을 자세히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동법의 실시 및 확산 과정을 알 수 있는 사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