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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중국의 100만 대군도 못한 거사를 한 윤봉길 의사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2743]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뒷줄임)
 

   
▲ 1932년 윤봉길 의사가 한인애국단에 입단할 때 찍은 사진(왼쪽), 선언문


위는 윤봉길 의사 (尹奉吉, 1908.6.21~1932.12.19)가 두 아들에게 쓴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라는 시 일부입니다. 윤 의사는 사랑하는 아들과 아내를 두고 돌아오지 못하는 먼 길을 떠났습니다. 1932년 4월 29일, 82년 전 오늘은 윤봉길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지금은 노신공원)에서 일제의 조선침략을 만천하에 응징한 것이지요. 윤봉길의사는 충청남도 예산에서 아버지 윤황과 어머니 김원상 사이에서 태어나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에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합니다. 이어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21년 성주록(成周錄)의 오치서숙(烏峙書塾)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다가 1926년에는 농민계몽·농촌부흥운동·독서회운동에 온 힘을 쏟습니다.

그러다가 1930년 “장부(丈夫)가 집을 나가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신념이 가득 찬 편지를 남긴 채 3월 6일 만주로 떠나지만 선천(宣川)에서 그만 미행하던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45일간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윤봉길 의사는 1931년 8월에 활동무대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옮깁니다.
 

   
▲ 아사히신문 1932년 5월 1일 치에 실린 홍구공원 의거 직후 사진 (왼쪽), 윤봉길 의사가 던진 것과 같은 물통 폭탄


윤 의사는 상해에서 백범을 만난 뒤 홍구공원에서의 전승 축하기념 식장에 폭탄을 던져 시라가와 대장을 비롯한 일본군 장교와 고관을 처단합니다. 이 일을 두고 중국 장개석 총통은"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고 높이 평가했고 이를 계기로 장개석 국민당 정부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계기를 마련해주게 되지요. 거사 뒤 일경에게 붙잡힌 윤봉길 의사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2월19일 24살의 꽃다운 나이에 사랑하는 아들딸을 남기고 숨져갔습니다. 오늘은 82년 전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며 조선의 독립을 만천하에 알린 매헌 윤봉길의사 의거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