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不識騎牛好(불식기우호) 소 타는 것이 이리 즐거울 줄은 몰랐는데,
今因無馬知(금인무마지) 나 다닐 말이 없는 까닭에 이제야 알았네.
夕陽芳草路(석양방초로) 해거름 저녁 무렵 풀 향기 가득한 들길,
春日共遲遲(춘일공지지) 나른한 봄날 저무는 해도 함께 느릿느릿.
이는 조선 중기의 문신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이 지은 <偶吟(우음, 그냥 한번 읊어보다)>이란 한시입니다.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뒤, 유유자적한 모습이 보이는 전원시이지요. 저 멀리 마을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땅거미를 타고 풀 향기가 솔솔 올라오는 들길을 소를 타고 가로지르는 모습은 마치 한 폭의 신선화 같은 느낌을 줍니다. 또 소를 타는 것은 세종 때 명재상 맹사성을 연상케 합니다.
▲ 학포 양팽손의 <산수도>, 국립중앙박물관
양팽손은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1510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습니다. 1519년 교리(校埋) 자리에 있을 때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게 되는데 조광조를 위하여 소두(疏頭, 연명(連名)하여 올린 상소문에서 맨 먼저 올린 이름)로서 항소하였다가 삭탈관직 되어 고향인 능주로 내려왔지요. 조광조 역시 능주로 유배를 오게되자 그와 더불어 책을 읽었으며, 조광조가 유배지인 능주에서 죽자 그의 시신을 수습하기도 하였습니다. 글씨를 잘 썼고 문장(文章)과 서화(書畵)에 뛰어났는데 그는 윤두서(尹斗緖), 허련(許鍊) 등과 함께 호남의 대표적인 문인화가로 꼽힙니다.
조광조는 일찍이 그를 두고 “학포와 얘기하면 마치 지초나 난초의 향기가 풍기는 것 같다. 비 개인 뒤의 가을 하늘이요, 얕은 구름이 걷힌 뒤의 밝은 달이라. 세속의 욕망이 깨끗하게 없어져 버린 사람이다”고 한 바 있습니다. 어지러운 사화(士禍) 속에서 자신의 입장과 철학을 지키다가 유배지로 떠나 온 삶이지만 난초의 청아한 모습처럼 살다간 양팽손. 그의 시 <우음>을 다시 음미하면서 세상 티끌 속에 물들지 않고 대자연의 품에서 해거름 저녁 무렵 소를 타고 풀내음을 맡을 줄 아는 여유를 새삼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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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남도 기념물 제92호 학포 양팽손의 학포당(學圃堂) |